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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제공/연합뉴스
역지사지는 교과서에만...
그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교과서에서만 존재하는 사자성어라고 했다. 어쩌면 요즘 아이들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 것일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이따금 시험에서나 보는 말일 뿐, 여태껏 주위에서 몸소 실천하는 이들을 만나본 적이 없단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젊은 부모가 아이와 함께 길을 가다 폐지 줍는 어르신을 가리키며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건넸다는 게 뉴스가 됐다. 등굣길에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분양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소식에 공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그 정도론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하도 익숙해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좋은' 학군을 찾아 자녀를 전학 보내려고 위장 전입하는 건 장삼이사들에겐 더 이상 흠결이 아니다. 나중에 고위 공직자로 나설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서열을 매기고 담을 쌓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학교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학교는 아이들의 되바라진 행동에 늘 가정교육을 탓하지만, 이는 스스로 학교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공범'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학교도 어느새 차별과 배제가 공공연히 벌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학교교육만으로는 더 이상 계층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걸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아니 학교교육이 신분 세습을 고착화시키는 합법적 수단이자 재생산 공장 같은 곳이 돼버렸다.
자사고와 특목고, 자공고와 일반고,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 등으로 서열이 나뉘었고, 다시 자사고에도 1류와 2류로, 일반고에서도 명문학교와 이른바 '똥통 학교'로 스스럼없이 구분 짓는다. 'SKY 서성한 중경외시'라며 대학 서열을 노래하듯, 이젠 고등학교까지 내려왔다. '일반고 전성시대'가 곧 올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면, 외려 아이들은 '백년하청'이라고 답한다.
비단 학교 간 서열만의 문제도 아니다. 일반고 내에서도 특별반이나 심화반이라는 이름만 내걸지 않을 뿐 최상위권 아이들을 '특별 관리'해주지 않는 학교는 거의 없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서열 의식이 마치 그들의 본성인 것처럼 철저히 내면화되어 있다.
아이들은 비슷한 서열끼리만 어울린다. 아무리 가정환경이나 성적과 상관없이 수업 모둠을 편성하고자 해도, 늘 결과는 한결같이 끼리끼리다. 한번은 아이들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성적을 기준으로 모둠을 편성했더니 다툼이 벌어졌다.
'수준 낮은' 아이들과 한 모둠에 엮이기 싫다는 게 발단이었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그런 욕설 가까운 말을 들은 아이들이 발끈하기는커녕 순순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서열화한 교실에선 '그들만의 리그'만 존재할 뿐 같은 반이라는 소속감을 애초 기대하긴 어렵다.
어떻게든 이를 막아야 할 교사들 상당수는 체념하는 빛이 역력하다. 아이들의 행태에 분노할지언정 그들을 가르쳐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며 일찌감치 손을 놓은 상태다. 심지어 이렇듯 뒤틀린 현실에 개탄하면서도, 시류에 재빨리 편승하는 교사도 적지 않다.
만만찮은 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자녀를 영어 유치원과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는 교사들이 많다. 자녀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물론 고등학교도 가능하면 '좋은' 아이들이 모이는 자사고와 특목고로 자녀를 진학시키게 될 것이다.
부모로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명색이 교사로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와 교실의 현실은 방기한 채 자녀를 서열화의 수혜자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를 따르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현실에 순응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체념한 사회... 정말 괜찮을까
교사의 체념과 좌절, 그리고 뒤틀린 현실과의 타협은 교육 전체를 불신으로 내몬다. 학부모들이 사사건건 교사의 무능과 자질을 문제 삼는 건 더께 가득 쌓인 불신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건 그저 다른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우리 교육계는 대학입시에만 온통 관심이 가 있다. 정시냐 수시냐, 수능이냐 학종이냐가 마치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지만, 신분제 사회로 고착되면서 교육의 본령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마당에 대학입시 따위가 뭐 그리 대수인가 싶다. 어차피 이든 저든 강자에게 유리하다는 건 불변의 사실 아닌가.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주워가라는 듯 발로 폐지를 찬 초등학생이나, 폐지 담긴 수레를 쓰레기통 삼은 중학생이나, 운전기사를 노예 부리듯 막말을 한 TV조선 대표이사의 딸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돈으로 서열이 매겨진 신분제 사회,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초등학생마저 갑질에 무감각한 우리 사회,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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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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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손녀 갑질논란, 아이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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