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의 일제강점기 수형인 카드황태성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황태성은 일제에 세 차례 수감되기도 하는데, 사진은 광주학생운동을 경성으로 확산시키는 활동을 이끌다 1930년 1월 체포된 이후 서대문형문소에서 만들어진 수형인카드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일보 뉴지엄을 끝으로 흑석길 아홉 개 코스에 대한 탐방을 마쳤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인지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흑석길을 걸으며 황태성(1906~1963)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만들지 못해서이리라. 황태성이 살았던 흑석동 산88-5번지는 현재 지번에서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조선일보 뉴지엄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을 곳에 있었을 것이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친형 박상희보다 더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으면서도 바로 그 박정희에게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인물이다. 아울러 지난 6월 사망한 김종필의 <김종필 증언록>과 김학민·이창훈의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등을 통해 최근까지도 '김일성의 밀사'인가, 아니면 단순한 '간첩'인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조만간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하면 그를 간첩으로 사형시킨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그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크게 불거질지도 모를 일이다.
황태성, 흑석동에 나타나다
그런 황태성이 처음 흑석동에 나타난 때는 1961년 9월 1일. 당시 흑석동에는 3일 째 폭우가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나 심했는지 이날 오전에는 흑석동 뒷산인 서달산 자락 언덕이 무너져 일가족 6명이 압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그날 북한에서 1950년대 무역성 부상까지 지낸 황태성이 중앙대학교 정문에 나타났다.
황태성이 휴전선을 넘어 우이동에 도착한 것은 하루 전인 8월 31일이었다. 그가 9월 1일 처음 찾은 곳은 남로당 출신으로 과거 친분관계가 있던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1913~1975)이 사장으로 있던 동양통신사였다. 그런데 마침 김성곤은 국제언론인협회 회의 관계로 외국에 나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대 강사로 있던 고향(경북 상주) 친구 김원출의 아들 김민하를 만나기 위해 흑석동을 찾은 것이다. 더군나다 김민하의 부인은 황태성이 앞으로 활동과정에서 큰 도움을 기대하고 있던 조카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김민하는 당시 중앙대 강사로 있었는데, 나중에는 중앙대 총장과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지냈고 지금은 <세계일보> 회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중앙대 경비실에 고향 아버지 친구가 찾아왔다고 해 김민하를 만난 황태성은 김민하의 집에 도착해 자신이 '김일성의 밀사로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왔다'고 설명한 후 조카 임미정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이렇게 해서 황태성은 1961년 10월 20일 갓 출범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될 때까지 50일 간 흑석동 산88-5번지 김민하의 집에 머물게 됐다.
황태성, 박정희·김종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흑석동에서 연행되다
황태성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날 수 있는 선을 찾아 나선다. 그는 우선 임미정-권상능 부부를 만나고, 그들 부부를 통해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인 왕학수 당시 고려대 교수와 죽은 옛 친구이자 동지였던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에게 연락을 취한다. 박상희와 조귀분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도 황태성의 소개가 결정적이었다. 조귀분은 박정희의 형수였을 뿐만 아니라, 김종필의 장모이기도 했다.
연락을 받은 왕학수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귀분이 어떻게 했는지는 2년 후 나온 '황태성 사건 진상 발표'와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진상 발표 자료는 김종필을 보호하기 위해 조귀분이 사위 김종필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중앙정보부장 경호관 이아무개 중위에게 신고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김종필 증언록>에는 김종필이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961년 10월 15일 오전 3시쯤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단 말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보통 일이 아닐 거란 생각과 함께 수화기를 들었다.
"큰일 났어예." 경북 구미에 계신 장모님의 다급한 사투리 목소리였다. "아니, 뭐가 큰일 났습니까." 한참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던 장모가 입을 열었다. "예리 아빠(JP)는 모를 텐데… 옛날 장인 친구인 황태성이라는 사람이 이북으로 넘어갔는데 이 사람이 내려왔어예. 나한테 박정희 의장하고 예리 아빠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네예." 장모는 조귀분(趙貴粉)이고 그분의 시동생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다.
장모의 목소리는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렸다. 듣고 보니 장모가 당황하실 만도 했다. 나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모는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못 만날 거라예"라고 답했다고 했다.
장모는 밤중에 구미경찰서로 가서 경비전화를 이용해 내게 전화를 거셨다. 아마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라서 경비전화를 빌려 준 모양이다. 나는 "장모님, 염려 마세요.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김일성이 내려보낸 황태성, "나는 밀사, 박정희 의장·김종필 만나게 해달라", 중앙일보)
그로부터 5일 후인 1961년 10월 20일, 황태성은 흑석동 김민하의 집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