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의 지옥도(단테 박물관)수많은 학자들이 신곡에 나온 지옥 입구의 위치, 지옥의 크기와 수용인원 등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박기철
갈릴레오와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시절부터 대학교들은 상급 학부와 하급 학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급 학부는 의학, 법학, 신학으로 구성돼 있었다. 하급 학부는 다시 3과(Trivium)와 4과(Quadrivium)로 나뉜다. 3과는 문법, 수사학, 변론술이었고, 4과는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이었다. 이런 하급 학부 7과목을 '자유로운 학문'(artes libeales)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교양 과목 정도로 볼 수 있다. 갈릴레오는 교양 담당 교수였다.
학부 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수학은 그리 중요한 학문이 아니었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갈릴레오가 처음 부임했을 때, 피사 대학교 학생 600여 명 중 2/3가 법학을 전공할 정도였다.
갈릴레오는 교수가 된 이후에도 학생 때처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규정상 교수는 반드시 가운을 입어야 했지만 갈릴레오는 계속 이를 거부한다. 심지어 가운을 입는 것은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경멸했다. 이러니 다른 교수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교수들 중 갈릴레오가 가장 경멸하는 인물은 지롤라모 보로라는 교수였다. 보로는 갈릴레오가 대학생일 때부터 교수였었다. 그는 피사 대학 최고의 학자였으며 강경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보로에게 고대 철학자들의 말은 성서 다음으로 신성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에 입각해 설명했다.
갈릴레오가 대학생일 때 피사에 우박이 내린 적이 있었다. 우박 덩어리들은 크기나 무게에 상관없이 똑같이 지면에 떨어졌다. 이를 보고 갈릴레오는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로는 우박들이 각각 다른 위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무거운 우박은 더 높은 곳에서, 가벼운 우박은 더 낮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동시에 지표면에 닿는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를 교묘한 말장난이라며 비난했다.
갈릴레오는 교수가 된 이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수업 중에는 학생들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동료 교수들을 공개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1590년,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큰 이벤트를 준비한다.
인류 이성의 위대한 도약, 자유낙하 실험
현재 피사의 사탑은 그냥 걸어 올라가기에도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어져 있다. 당시에는 기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으나 무거운 금속공들을 옮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조수를 동원해 금속공을 꼭대기로 옮겼다. 이 실험의 목적은 물체가 무게에 상관없이 똑같이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작은 규모로 손 쉽게 실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갈릴레오는 이렇게 대중의 주목을 끄는 극적인 연출을 좋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실험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실험이 실제로 피사의 사탑에서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어찌됐든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깨부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실험 결과, 두 물체가 동시에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시차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반대파들은 갈릴레오의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갈릴레오는 분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00파운드짜리 공이 100큐빗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때 1파운드짜리 공은 1큐빗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두 공은 동시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시험을 해보면 큰 공이 작은 공보다 2인치 앞서 땅에 떨어진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2인치 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99큐빗을 숨기고 있다. 오직 나의 작은 오차만 떠벌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청난 실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교회의 적 과학의 순교자 갈릴레오>,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