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3.1만세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는 <매일신보>(1919. 3. 25)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처음에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지 않다가 3월 7일부터 '소요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왜곡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1919년 일제에 맞선 3.1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지던 무렵, 이곳 노량진에서도 3월 23일 만세 운동이 벌어진다. 노량진 3.1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틀 후인 3월 25일 자 <소요사건의 후보>라는 제목의 기사에 "오후 팔시 반경으로부터 구시경까지 삼백여명의 군중이 모여서 소요를 하얏더라"라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시위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가까운 영등포역 앞과 당산리(지금의 당산역 주변)에서도 동시에 벌어진다. 세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유는 영등포경찰서의 진압 활동에 차질을 주기 위한 시위 주동자들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일제가 영등포와 당산리에서는 "주모자를 검속하고 진압"하거나 "군대와 경찰이 협력하여 진압"했지만, 노량진에서는 진압되지도 않았고 연행된 사람도 없었다.
당시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같은 언론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처음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외면했던 <매일신보>는 사건이 계속 확산되지 뒤늦게 '소요사건'으로 보도했다. 일제가 만세운동의 규모나 양상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노량진 3.1만세운동의 규모는 <매일신보>의 보도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3.1혁명 100주년에 우리가 기릴 것은 무엇인가
동작구 사당동에는 삼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이 삼일공원은 100년 전의 3.1운동과는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이 아니다. 1967년 여성독립운동가 최은희가 <동아일보>에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다"는 칼럼을 쓴 게 계기가 됐다. 이에 박정희는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싼 곳 중 하나였던 사당동에 독립공원 부지를 지정만 하고 예산 지원은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방치되다가 1990년 중앙정부가 아닌 동작구청이 삼일공원으로 뒤늦게 조성했다.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동작구청이 어설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삼일공원에 기울이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실제 벌어졌던 자랑스러운 역사 '노량진 3.1만세운동'에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해본다.
노량진역 광장에서 만난 경성트로이카의 이관술과 박진홍은
노량진역 광장은 1937년 6월 말 삽을 짊어진 농부로 변장한 경성트로이카의 이관술(1902~1950)과 동지 박진홍(1914~?)이 비밀리에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