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텔로의 청동 아티스상(1440년) 아티스는 양성애자인 아그디스티스의 아들이다.
박기철
이 두 작품은 동성애적인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던 도나텔로는 대표적인 동성애자였다. 그 역시 여성을 멀리하고 미소년들을 가까이했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드라마인 '메디치 – 피렌체의 지배자들(Medici – Masters of Florence)'에서도 도나텔로가 어린 미소년과 함께 잠자리에 있는 장면이 나온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유행이었다고 해서 당시 대중 정서까지 동성애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동성애는 분명한 범죄였고 혐오의 대상이었다. 동성애자로 고발되면 끔찍한 고문을 받고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피렌체 사회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동성애자라고 모두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누군가의 '고발'이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공공연히 동성애자라고 소문이 나더라도 고발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결국 뒤를 봐줄 수 있는 부자나 권력자와 친분이 있어야 했다. 동성애자로 고발당했던 다빈치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성애 상대가 고위층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모든 동성애자가 고위층과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동성애는 여전히 은밀했고 소수였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동성애 혐오를 부추기기도 했다.
소도시 루카에게 당한 참패
피렌체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15세기 초 루카 전쟁은 피렌체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준다.
루카는 피렌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로 피렌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에서 독립하기 위해 피렌체의 적국 밀라노와 손을 잡는다. 그래서 1429년 11월 피렌체는 루카를 진압하기 위해 용병 부대를 투입한다.
피렌체는 루카를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쟁은 길어졌다. 용병을 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국내 정서도 점차 나빠졌고, 피렌체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피렌체 정부는 두오모 성당의 돔 공사로 유명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를 전선으로 급파한다. 건축가가 전쟁에 자문 등의 형태로 개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훗날 미켈란젤로 역시 피렌체 방어를 위한 성벽 관리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브루넬레스키는 아주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댐을 쌓아 루카의 젖줄인 세르키오 강을 막는 것이다. 이렇게 물줄기를 돌려 루카를 에워싸면 루카가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항복하지 않더라도 댐을 터뜨려 루카를 공격할 수 있었다.
여러 지휘관들이 이 계획을 비판했다. 무엇보다 댐의 안전성이 문제였다. 피렌체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본 결과, 댐은 일반인이 육안으로 보더라도 매우 허술하고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두오모 성당의 돔 공사를 시작할 때도 다들 불가능하다며 반대하지 않았던가? 브루넬레스키는 반대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머저리들은 모두 전쟁터로 쓸어 내버려야 한다고 필리포는 주장했다.(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희재 옮김, 세미콜론, 186쪽)
하지만 댐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그사이 댐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루카가 돌격대를 편성해서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댐 일부가 터지고 강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터진 강물은 루카가 아니라 피렌체 군대를 덮쳤다. 피렌체 군대는 허겁지겁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 했고, 브루넬레스키의 침대도 물살에 떠내려갔다.
여기에 밀라노가 루카를 돕기 위한 원군을 보내면서 전황은 더 불리해졌다. 피렌체는 밀라노의 용병대장 스포르차에게 뇌물을 주어 돌려보낸다. 하지만 이후 다시 이어진 루카와의 전투에서도 피렌체는 참패를 당한다.
권력자들을 위한 희생양이 되다
이 패전으로 피렌체 정부는 궁지에 몰린다. 용병과 댐 공사에 막대한 국고를 쏟아부었던 정부는 엄청난 재정 부담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평소 우습게 여기던 작은 도시 루카에게 당한 패배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정부는 시민들의 분노를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패전의 책임이 군대 내 퍼진 동성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들이 늘어나서 군기가 문란해졌고 군인들이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군 내부에 동성애가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책임 회피를 위한 군과 정부의 억지였다.
1432년 정부는 군대 내 동성애자를 색출하기 위해 우피치알리 디 노테라(야간국)라는 기관을 만든다. (노테는 '밤'이라는 뜻과 함께 '남색가'라는 뜻도 있다.) 누구라도 동성애자로 의심되면 끌려가 고초를 당해야 했다. 진짜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 소수의 희생쯤은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정부에서 동성애자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했지만 피렌체 군대의 전투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밀라노와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던 피렌체는 결국 1433년 굴욕적인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정치적으로 아주 훌륭한 도구인 듯하다. 피렌체의 아웃사이더 혐오는 이민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5
공유하기
군대 내 동성애 때문에 패전? 정부는 혐오를 이용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