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의 백련 7~8월에는 월지에 연꽃이 피어 청초한 풍경을 더한다.
홍윤호
그런데 문무왕이 이 거대한 인공 연못과 건축물들을 만든 시점은 674년이다(정확히 말하면 674년에 시작해서 679년에 끝났다). 674년, 이때는 아직 나·당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끝나기는커녕 하루하루가 급박한 형세를 이루고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당나라와의 전쟁은 요즘 식으로 따지면 미국과의 전쟁이다. 현실적으로 이기기 어려운 무모한 전쟁이었던 셈. 그래서 내부에서는 당과 내통한 귀족(아찬 대토)의 반란 음모가 진행되기도 했다. 사전에 발각됐지만.
오죽하면 김유신이 사망(673년)하기 한 달 전에 문무왕이 병석의 그를 찾아가 "만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봤을까. 다 죽어가는 외삼촌에게 뭔가 대책이 없냐고 물어보고 있으니, 문무왕 본인에게 별다른 대책도 없었고, 최후의 순간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의미이다.
왕자 시절부터 중국을 오가며 전쟁과 외교를 오락가락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도 경험하고, 아버지(태종 무열왕)가 사망한 후에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전쟁터에 직접 나서기도 하며 아차 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피곤한 긴장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이른바 총력전의 상황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정신적 압박을 받아서였을까. 잠시라도 쉬고 싶어서였을까. 자칫하면 전쟁 중에 왕이 놀이터 만들었다고 비난받을 만한 일인데, 월지(안압지)를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전쟁 중이라도 서라벌(경주)은 안전 지대였기 때문에 홈그라운드에서만은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을까.
동궁에 동물원을 만들고 인공 연못인 월지를 만든 674년, 이 1년 동안은 대규모의 전투가 없었던 일종의 휴식기였다. 어느 정도 긴장을 풀며 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왕이 되기 전부터 전쟁에 휘말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승산 없는 전쟁 때문에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 왕 다운 권력과 즐거움(?)을 누려보지 못했던 그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불과 1년 전인 673년은 신라군이 임진강 일대에서 당군에게 파멸적 패배를 당하고 군대와 식량이 부족하다고 쩔쩔매던 시기였다. 만약 당군이 승기를 타고 그대로 밀고 내려왔으면 큰 위기를 맞았을 텐데, 당군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군대를 재정비하고 준비하는 1년여 시간의 여유가 있어 이때 동궁과 월지를 조성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동궁과 월지를 조성한 다음 해인 675년 당군과 신라군이 정면 대결을 벌인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고 전황이 유리해졌다는 점이다. 676년의 기벌포 전투에서는 신라가 당의 설인귀 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결국 당은 한반도에서 발을 빼게 된다. 신라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던 것.
이렇게 전쟁이 승리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패배하거나 굴욕적인 결과로 끝났다면 이 동궁과 월지의 조성은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아마 제정신이 아닌 왕의 일탈이거나 폭정의 상징 혹은 전쟁 패배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