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데렉 해진 파커한국이름 '안해진', 데렉 해진 파커는 소아마비를 앓던 채로 일산 홀트 복지원 계단 앞에 유기되었다. 그는 이미 2명의 낳은 자녀가 있는 미국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수차례의 수술과 치료로 상태는 나아졌지만, 휠체어를 타야하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데렉 해진 파커
"저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고, 휠체어를 타고 회사나 음식점, 교회 등 원하는 곳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자유와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고요." 데렉은 미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거나 꺼려진 적이 거의 없다. 휠체어를 탄 그가 홀로 운전할 수 있는 장애인용 자동차가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도 무리가 없어서 미국의 거리에서는 장애인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미국의 지하철은 쉽게 내리고 탈 수 있도록 턱이 없고 사이의 빈 곳이 거의 없다. 지하철 내부에는 장애인들을 위한 버튼이 있어서, 장애인이 내릴 때 누르면 문이 느리게 닫혀서 중간에 걸릴 위험도 없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특별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장애인을 먼저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 태도가 자연스러운 에티켓으로 자리잡혀 있기 때문에 데렉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 장애인들은 자신의 장애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다.
그는 입양되었기에 너무나도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원하는 학교를 고를 수 있는 자유(그의 부모님은 그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분들이었다.), 종교와 신념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많은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자유, 결혼할 수 있는 자유(그는 비장애인이며, 자기와 다른 인종인 여성과 결혼했다.),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자유, 살고 싶은 지역과 집을 고를 수 있는 자유……. 그밖에도 입양은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유'를 제공했다.
데렉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일절 삼갔고, 그에게 좋은 말만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을 집으로 초대했고, 한국 음식도 자주 만들어 주었다. 1991년, 18세 되던 해에 데렉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여름에 아버지가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 준 것이다. 그는 6주 동안 머무르면서 즐겁게 한국 친구들을 만났고, 한국 문화를 체험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간 데렉은 대학에 진학했고, 결혼을 했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집을 샀으며, 세 명의 아름다운 자녀를 얻었다. 또 MBA(경영대학원) 과정을 이수했고, 몇 차례 개인 사업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6년 10월 한국을 다시 찾았다. 'Happy Together' 투어에 참여하기 위한 방문이었는데, 이때 그는 많이 놀랐다. 한국이 첫 방문 때와 엄청나게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15년 새 한국은 정말 먼 길을 걸어왔더라고요. 그러나 장애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아직도 걸어야 할 먼 길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장애인의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 그들의 불편함과 어려움에 대한 공감이 말이죠. 물론 한국은 이미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아직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 위한 공공시설은 너무 부족합니다." 그의 말처럼 한국도 변했다. 장애인을 위한 화장실, 자동문, 엘리베이터 등 많은 시설이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곳곳은 턱으로 막혀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애인도 드물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장소에서 장애인들을 향한 불편한 시선이 존재한다. 여전히 한국의 장애인들은 음지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또 한국에서 일산홀트복지원을 방문했다. 그곳은 그가 세 살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임시 보호를 받는 젊은이들이나 18세가 지나 퇴소해서 홀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그들을 보호해주는 시설이 있고, 독립해서 살아갈 최소한의 자금이 지원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데렉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입양은 그를 시설에서 벗어나게 했고, 장애로부터도 자유롭게 해주었다. 또한 그는 입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자기 삶의 근간이 되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데렉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비교적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일부 해외 입양인들이 겪는 인종차별의 경험이 아예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입양'은, 그가 '한국에서 부모 없는 장애인으로 시설에서 살며 받았을 차별'을 막아주었다. 데렉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으로서 받은 차별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받은 것이다. 그마저도 살아가면서 장애는 자신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체득하면서 무시할 수 있었다.
근대화 이후 한국은 큰 발전을 이루었고, 데렉을 포함한 많은 해외입양인은 그런 모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모국이건만 아직도 해외 입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법'으로 해외 입양을 막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데렉의 경우를 보면, 그에 대한 해답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갑질'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는 집단 내 소수자나 약자가 되는 순간 불편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다수가 아닌 사람, 예외적인 자'로서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보편적인 둔감함도 그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입양 가족' 편견 버리고, 아동의 권리를 중시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