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과 김구거사에 앞서 김구와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홍윤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눈을 빛내고 있는 25세의 한 청년이 있었다. 짧은 세월을 살아온 그에게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이나 망설임이란 없었다. 더구나 이미 어제 이화림이라는 여전사와 함께 부부로 가장하여 식장을 사전 답사해서 그런지 익숙한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바다를 건너와 상하이를 점령, 장악하고 천장절(일본 국왕 탄생일) 겸 전승 축하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만주를 침략(1931년 만주사변)한 일본에 대한 중국과 국제사회의 비난과 위기 의식이 고조된 때였으나, 아무도 이를 막아내지 못하던 때였다.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장제스의 30만 국민당군은 패배하여 쫓겨 갔고, 상하이는 일본군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상하이 한복판에서 거행하는 화려한 행사는 1만여 명의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오전 11시 20분 경 1부의 열병식이 끝나고 곧 이어 2부의 축하식이 이어졌다.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와 주중총영사 무라이의 축사가 끝나고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서 엄숙하게 기미가요를 합창하였다. 축하식이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다.
이때 군중들 사이에서 그가 움직였다.
1930년 23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의 뜻을 세운 다음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을 남기고 집을 나온 지 햇수로 3년째, 그는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잠시 눈에 밟히긴 하였으나, 곧 품속에서 두 개의 폭탄을 꺼냈다. 하나는 수통형 폭탄, 그리고 하나는 자결용 도시락폭탄.
그는 수통형 폭탄을 꺼내들고 2~3m 더 전진해 들어가 행사장 무대를 향해 숨을 고른 다음 하나 둘 셋~ 온 힘을 다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폭탄은 무대에 정확히 떨어졌고, 바로 큰 폭음을 내며 순식간에 무대를 날려 버렸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을 비롯하여 제 9사단장 우에다 중장, 해군 사령관 노무라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 단상 위 7명의 장군들과 참석한 인사들이 모두 쓰러졌다.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는 배에서 창자를 쏟으며 단상 위에 꿇어앉아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행사장은 난리가 났다. 비명소리와 자욱한 연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일본군 장성들,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가는 사람들, 아수라장이었다. 무대 주변에 있던 일본군 헌병들이 혈안이 되어 폭탄이 던져진 지점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자결용으로 준비한 도시락폭탄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빨랐다. 헌병이 그를 덮쳤으며, 뒤이어 몰려든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아 옷이 찢겨졌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거사 직후 일본군 헌병대, 정보부대가 총동원되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고, 그에 대해서는 이틀간에 걸쳐 배후 세력과 지시한 자에 대한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5월 10일 한인애국단장 김구가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까지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이름 윤봉길. 꽃이 만발한 4월, 25세의 한창 나이에 일제 강점기 수많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이 일제의 힘과 일제 치하의 현실을 인정하고 나약한 지식인이 되거나 일제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해가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 의거의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