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군정종식 및 후보단일화 촉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후보가 1백만 군중을 몰고 기선을 점하자(위), 이에 뒤질세라 12월 13일 김대중 후보도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당시 선거 최대 인파를 과시하며 맞섰다(아래)
민청련동지회
근거 없는 낙관론, '4자 필승론'
애초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지('비판적 지지'의 줄임말)는 민중운동에 중심을 두고 민중 역량 강화를 위해 채택된 전술적 방침이었다. 즉 '민중역량 강화'가 전략적 목표고, '대통령선거 승리'와 '김대중 지지'는 전술적 방침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 승리'는 6월항쟁과 마찬가지로 '민중역량 강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양김 후보단일화는 비지 진영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비지는 '김대중 단일화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지 진영은 점차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 논리에 빠져 들어갔다.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오면서 '4자 필승론'이 김대중 지지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유포됐다. '4자 필승론'이란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4자가 모두 함께 나와 경쟁하는 구도가 김대중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구도라는 것이었다. 지역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후보들이기 때문에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수도권에서 우세한 김대중 후보가 4자 대결에서 유리하다는 순전히 선거공학적인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4자 필승론'은 선거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아전인수 격인 논리였고, 더구나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시대조류를 도외시하고 지역감정만을 토대로 한 계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논리대로라면 양김 단일화는 필요 없고, 오히려 분열되어 있는 게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4자 필승론'은 운동론이라고 하기보다는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 김대중 지지자들을 고무하고 단결시키기 위해 만든 선거용 구호였다. 그러나 어쨌든 김대중 선거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재야의 비지 그룹 역시 선거 막판에 점차 이 '4자 필승론'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민청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가 네 후보 중 지지율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김대중 선거운동본부의 정보를 믿었고, 그래서 선거 감시만 잘하면 김대중 후보가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들었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김병곤의 고육지계바로 이 때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병곤이 나섰다. 민통련 중집회의 직후 열린 민청련 의장단회의에서 김병곤 부의장은 양김을 공동투쟁 전선에 세워서 그 과정에서 대중 속에서 단일화를 성취하자고 제안했다.
즉 재야가 주도하는 대규모 반독재 군중집회를 전국 주요도시를 돌며 개최하고, 이 집회에 양 김을 앞장세우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보다 국민의 대중의 지지를 더 받는 후보가 가려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단일화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내놓은 고육지계였다. 의장단회의는 이 제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김병곤은 1985년 김근태 '고문공대위' 때부터 꾸준히 이어온 노학청 연대 테이블에 이 문제를 올려 청년학생 주도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획했다. 전두환 퇴진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당시 9총 이후 노학청 연대를 담당했던 최성웅 청년부장이 노학청 연대회의에서 이러한 집회의 공동개최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집회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전국적 청년학생단체 결성 날짜와 맞추기로 했다.
한편 권형택 부의장은 국본 실무자로 근무하면서 동시에 전국의 청년단체들과 전대협 산하 학생회들을 결집시켜 전국적인 단일 청년연대단체를 국본 산하에 결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당기간의 치밀한 조직 작업 끝에 드디어 9월 18일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아래 청학공위) 결성 총회와 대표자회의를 가졌다.
여기에서 전대협 이인영 의장과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이 청학공위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아울러 이 회의에서는 청학공위 공식 창립대회를 10월 중에 대중집회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바로 김병곤이 기획한 집회와 시간상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청학공위에서는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고려대 대운동장에서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 창립대회 및 공정선거 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쟁취 실천대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여기에 양김을 연사로 초청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