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바 풍경
차노휘
리곤데 알베르게오늘도 나는 침대를 배정받았다. 리셉션에서 준 일회용 침대 시트를 깔고 일회용 베개피를 베개솜에 끼워넣었다. 남자 다섯 명에 여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나였다. 시골 알베르게에 묵으면 이런 경우가 많다. 어제 같은 방에서 잤던, 마틴 외에 퍽이나 지적이면서도 잘 생기고 도도한 아일랜드 남자가 내 옆 침대를 차지했다.
어제 내가 알베르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나이 든 순례자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노숙한 목소리와 잔뜩 격식 차린 말투 때문에 대체 어떤 남자인가 호기심이 생겼던 인물이었다. 처음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40대 후반이나 되는 줄 알았다. 2층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격식 차린 말투가 아닐 때는 그 나이 또래의 음성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한번 더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그는 내가 독서하고 있는 야외 의자로 왔다. 그의 손에도 책이 들려 있었다. 나는 일이 있는 사람처럼 일어났다. 내가 일어서자 살짝 얼굴을 찡그린 그가 보였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5분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순례자 정식을 시키고는 와인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더니 그도 와인 한 병을 시켜서 친구와 함께 마셨다. 내가 일어났을 때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발을 절면서 축사가 많은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알베르게로 들어오는 길, 말끔한 차를 타고 온 아버지와 아들이 알베르게에서 도장만 받고 다시 사라져버렸다(이런 시골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에서 잘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곳은 순례자에게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 꼭 저렇게라도 해서 완주증을 받고 싶을까.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경력이 될 수도 있겠다. 얌체족은 어느 나라에나 있으니깐 말이다.
오늘이라는 오늘, 별의별 일들을 잔뜩 품은 해가 말끔한 차가 사라진 길 위로 침묵한 채 하산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청년은 엷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나는 양치를 하고는 술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발바닥 소독하고 밴딩하는 작업은 시간을 많이 잡아 먹었다. 누구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침낭을 얼굴까지 덮은 나는 이상하게 새로운 사람에게 흥미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반기는 사람은 사리아 이전에 만났던 사람뿐이었다. 스쳐지나가는 관계, 일회용처럼 짧은 만남, 형식적이고 잔뜩 격식 차림 만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오늘의 스위치를 끄자고 중얼거렸다. 답을 내리지 못할 많은 질문들. 현재진행 중인 많은 생각들. 드디어 다음 주에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도착한 뒤에는 생각을 정리하고 답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끝나지 않을 길처럼 생각도 질문도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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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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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단거리-장거리 순례자 구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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