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나세카(Molinaseca)
차노휘
돌다리를 건너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은 바와 슈퍼마켓이 있었다. 다음 마을을 오늘 종착지로 정했다. 그만 여기서 머무를까? 갈등이 일 정도로 마을 풍경은 나를 유혹했다. 아픈 발바닥을 쉴 겸, 마을 마지막 바에서 생맥주를 한 잔 시키고 상황을 보기로 했다.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을 벗어나면 목적지까지 8km 주도로를 걸어가야 한다. 2시간 정도 걸리는 땡볕 길이다. 나는 천천히 맥주를 들이키며 정오가 지난 시간, 먼 도로 너머로 일렁거리는 아지랑이를 보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대체, 나를 이 땡볕에 걷게 만드는 원동력은 뭘까.
전에는 욕심도 내 편이라고 여겼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노력들이 높게 평가받기도 했다. 정당화된 욕심과 주변의 칭찬은 더 과감하게 내 자신을 몰아붙이게 하였다. 다행히도 건강한 몸이어서 잘 버텨냈을 뿐이다. 그렇지만 길을 걸으니 달랐다. 오로지 내 두 다리의 힘으로만 오랜 시간 걸어야 하니 몸에 집중할 수 있다. 몸의 작은 변화도 감지가 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줄어드니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만했다. 욕심은 도시나 이곳이나 똑같이 달콤해 보였다. 조금만 더 빨리, 더 많이 걸으면 유럽의 땅끝 마을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욕심은 한계를 넘어서 몸을 망쳐 버렸다.
오전에 생각했던 나의 장점? 쳇! 욕심 앞에서는 다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다. 긍정적이 아닌 비합리적인 낙천주의자다. 먹고 자는데 불편이 없고 쉽게 환경에 동화되는 것이 장점이 되는 것은 육체적으로 건강했을 때의 이야기다.
- 김진세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이봄, p.287
어느 날 슬럼프에 빠진 정신과 의사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다. 그도 나처럼 고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릎 관절 통증 때문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그를 추동하는 힘인 '욕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욕망(차이는 있지만 '욕심'을 '욕망'이라고 바꿔 부르기로 한다). 욕망은 나를 키우면서도 나를 망치게 하는 두 얼굴이다. 또한 나를 추동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살면서 욕망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단호한 'No!'이다. 불가능하기에 영리한 공존법을 터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나' 가 '나'를 이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힘은 마음을 비울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비우는 힘. 비울수록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힘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하산길에서의 겸손한 마음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싶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꽃'에 눈길을 줄 수 있듯이 말이다.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진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이글거리는 태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 속에서 조금 더 걷자고 속삭였다. 아지랑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듦을 알면 내 속의 사소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좀 더 고생을 해도 괜찮을 나이라고.
결코 끝나지 않을 길처럼 질문도 답도 멈추지 않을 그 길을 나는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