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박용주 모습전남 순천 효천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인 듯싶다.
아침
"86, 88의 신화"는 86아세안게임과 88올림픽을 말한다. 그 무렵 전두환 군사정권은 우리나라가 아세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를 만큼 국력이 올랐고, 이 두 행사를 잘 치르면 곧 선진국이 될 것인 양 광고를 하던 때이다. 그런데 그때 그는 "학교마저 쉬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허기로 쓰러"지기도 했다. 위 구절을 보면 1986년 학업을 중단한 것도, 고흥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도 집안 사정 때문인 것 같다. 어린 소년은 "끝없는 좌절"과 "막막함과 칙칙한 절망감" 속에서 언제나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가끔 혼자 울었"다고까지 한다.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모시고
그는 머리말에서, "편모슬하, 결손가정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조금의 잘못도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어머니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아버지를 노래한 시는 '하직인사' 한 편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관을 하고 마지막 절을 올릴 때 / 나는 일곱 살, 동생은 두 살이었지요 // 묘역 곳곳에 빨갛게 피어난 사루비아와 / 자꾸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지요 (...) 청명한 구월 그날의 하늘은 / 별나게 푸르러 눈부셨지요 // 나는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묻고 (...) 올 때마다 가슴에 쌓이는 것은 설움이요 / 돌아서는 발걸음은 납덩이인데 (...)" (1989년 2월)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일곱 살'이라면 세는나이로는 여덟 살이고 1980년이다. 시에서는 망월묘지 곳곳에 샐비어가 빨갛게 피어난 "청명한 구월"에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모셨다고 한다. 샐비어 꽃은 7월 하순부터 가을 서리가 올 때까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5월이 아니고 9월이 맞기는 하지만 '목련이 진들'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시가 암울한 80년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죽음과 1980년 5월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망월묘지가 광주시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80년 5월과 아무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