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드리운 먹구름
차노휘
만시야(Mansilla de las Mulas)를 7km를 남겨두고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 잽싸게 배낭 커버를 씌우고 우비를 꺼냈지만 비는 곧 그쳤다. 날씨는 꾸물거렸지만 바람이 불어 걷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끝없는 자갈 오솔길. 내 시야가 닿는, 움직임 없는 정면 하늘. 앞뒤로 보이지 않는 순례자들. 변함없는 풍경을 가로 질러 나 있는 길. 그곳에 나만 홀로 걷고 있었다. 모 시인이 일찍이 젊은 나이에 극복했다는 절대고독은 어떤 걸까. 풍경에 홀로 고립된 이런 기분을 두고 하는 말일까. '절대 고독'이라는 어휘 자체를 꺼낸다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이와 비슷할 거라고 단정했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김경주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배낭을 메고 플라타너스 오솔길을 홀로 걸어가는 나는 젊은 붓다도 젊은 예수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라는 외로움에 지친 절름발이 순례자를 자청하는 한 사람이었다. 이런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을 붓다나 예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그 용기는 얼마나 대단한가. 그의 자존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이마에서 땀 한방울이 흘러내려 입 속으로 들어왔다. 짭짜래한 그것은 뜨거운 한 점 열이었다. 내 속의 열. 외로움의 열. 고독의 열.
아들이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수술 전 자궁의 3분의 1만이라도 남겨달라며 의사를 붙잡고 울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비근한 삶에 그래도 무겁다고 해야 할, 첫 시집을 이제 잠든 당신의 머리맡에 조용히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초대 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
위의 발췌문은 일찍이 절대 고독을 극복했다는 모 시인의 첫 창작집 '시인의 말'에서 따온 마지막 문단이다. 나는 그곳에서 특히나 "초대 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라는 구절을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저 표현은 역설이었다. 외로우니 나를 봐달라는 지독한 고집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기형'이라는 어휘로 강조점까지 제대로 찍지 않았는가.
내 초라한 걸음걸이. 누군가에게 초대받은 적도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과 같은 이곳에서의 순례길. 그것은 기형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었다. 편한 길을 놔두고 험한 길로 나선 것은 순전히 내 의지였다. 그런데 나는 그 기형에 애정이 가니, 그것은 또한 어떤 연유일까.
"사람들아, 나 좀 봐주소!"라고 나는 외치고 있지 않는가.
나는 또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을 끼고 있는 양쪽 하늘. 그리고 머리 위 쾌청한 하늘. 길게 뻗어 있는 길. 따가운 발바닥. 자갈길이 밑창에서 부서지며 연약한 속살을 건드렸다. 왼쪽 발바닥은 돌멩이 하나 들어간 것처럼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발을 벗고 털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통증이 일어날 때마다 외로움과 고독이 더욱 생생해졌다. 그럴 때마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절대고독을 견뎠다는 모 시인의 자신감에 하나하나 말뚝을 박았다.
"그래, 당신 잘났구려, 잘났구려, 고작 이 정도에 나는 무너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