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다 토렌티노의 기마상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1456년, 피렌체 대성당
박기철
이 두 명의 용병대장을 그린 그림은 유달리 푸른색을 띠고 있으며, 구도 역시 특이하다. 원래는 청동상을 조각하려고 했으나, 전쟁으로 자금이 부족해서 청동상 느낌이 나는 그림으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 용병대장들은 용맹과 지략, 신의를 지닌 훌륭한 용병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렇게 용병들을 고용하는 전쟁에는 장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되니, 시민들의 희생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장점보다 문제점이 더 커졌다.
용병은 전쟁이 직업이다. 따라서 이들은 좋은 '밥벌이'가 계속되길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바로 죽지 않는 것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당시의 전쟁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과 사뭇 달랐다. 자신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안전한' 전쟁이 가능한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전쟁에서 한쪽 편이 용병을 고용했다면, 상대편도 마찬가지다. 현대 스포츠 선수들이 구단을 옮겨 다니는 것처럼 용병도 이리저리 부대를 옮겨 다니곤 했다. 그러다 보니 적군이라도 서로 아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적군을 공격하되, 죽이는 것도 아니고 포로로 잡는 것도 아닌 희한한 전쟁이 이탈리아식 전쟁이었다." - 팀 팍스 <메디치 머니>(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125쪽)
이런 이탈리아식 전쟁에서 용맹과 신의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이런 사례는 여러 개가 있다. 1422년 밀라노와 피렌체는 '자고나라'라는 도시에서 맞부딪혔다. 엄청난 폭우 이후 진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피렌체는 수천 마리의 말을 잃고 대패했다. 하지만 전사자는 말에서 떨어져 흙탕물 속에서 익사한 두세 명뿐이었다. 사람의 희생보다는 수천 마리의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패'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니콜로 피치니노라는 유명한 콘도티에레가 있었다. 피렌체는 밀라노와의 전쟁을 위해 그를 고용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밀라노에서 피치니노에게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은밀히 제의하자, 피치니노가 밀라노의 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용병에게 신의 따위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피렌체는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밀라노를 막아냈지만,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시민 위한 용병이 시민의 목을 죄다용병을 고용해서 치르는 전쟁은 일반 시민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서민들에게 고통만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용병부대에 지급해야 할 돈은 결국 모두 시민들의 세금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부대는 전쟁에서 져도 돈을 받아갔다.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이 비용을 충당했고, 이 부채는 모두 세금으로 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전쟁은 이기나 지나 막대한 금전적 부담을 지게 되고 결국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 뿐이었다. 1427년 5년간 치른 전쟁에서 피렌체가 쓴 돈은 300만 플로린에 달했다(약 2조 원 이상).
높은 몸값을 받은 용병들은 은행을 이용해 그들의 고향으로 거액을 송금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송금 수수료를 받았다. 이뿐 아니라, 은행들은 앞서 얘기한 국채를 통해서도 이자 수익을 올렸다. 이렇게 은행이 짭짤한 수익을 챙기는 동안 시민들은 생활고에 신음했다. 생활고로 죽은 사람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보다 더 많기도 했다.
이렇게 용병에 의존하는 전쟁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여러 나라들은 힘을 합쳐 샤를 8세에 대항했다. 이때 역시 용병을 고용했는데, 대부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피렌체 시민들은 도시 안까지 밀고 들어온 샤를 8세의 군인 1만 2천여 명의 숙식을 책임져야 했다.
시민들의 불안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가 백묵 한 조각으로 이탈리아를 점령했다'며 분노했다. 프랑스 군대가 자신들이 머물 집을 지도에 백묵으로 표시만 해도 점령할 수 있었을 정도로 무능했던 용병부대를 비판한 것이다.
이런 일들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용병이 아니라 애국심과 자긍심을 가진 군대를 직접 보유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봤을 때, 용병들은 "더 많은 급료를 받기 위해 전쟁을 질질 끄는 등,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호하는 악당(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문학동네, 310쪽)"들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정부에서 일할 당시, 피렌체는 독립을 요구하는 피사와의 전쟁을 10년이나 질질 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길 바라지 않는 용병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이 축소될 것을 걱정한 지도층은 정규군 창설을 계속 반대했다.
결국 세금 부담이 계속 커지자 피렌체 정부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1506년경 피렌체 정규군을 창설하게 된다. 지금으로 본다면 드디어 자주 국방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고는 거덜이 난 상태였다. 거기다 마지막 재정을 짜내어 창설한 이 정규군 역시 이후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게 된다. 이로써 피렌체의 공화정은 막을 내린다.
전쟁은, 용병이든 정규군이든, 이기든 지든, 결국 일반 국민들의 처절한 고통을 담보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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