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올림픽 개막식 동시 입장. 평창 동계올림픽 홈페이지에서 캡처한 영상.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하지만 올림픽 이외의 국제대회에서는 단일팀 구성이 성사됐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및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는 남북 단일팀이 참가했다. 청소년축구에서 8강 진출에 성공한 것도 대단하지만, 여자 탁구에서 거둔 단체전 우승은 온 민족에게 격한 감동을 선사했다. 남북한 각각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했던 중국 탁구의 장벽을 코리아 단일팀이 붕괴시킨 것이다. 2002년에 <체육사학회지> 제10호에 실린 정찬모의 '남북 체육교류의 역사와 발전 방향'에 이런 글이 있다.
"코리아 탁구 단일팀의 우승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남북한에 중계됨으로써 7천만 겨레에게 우리가 진정 한민족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우리에게 왜 통일이 필요한 것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언론은 '냉전 장벽에 탁구 구멍 뚫다'라든가 '코리아팀이 새긴 역사' 등의 표현을 써서 그 감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단일팀이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탈냉전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공동응원을 계기로 신뢰 분위기가 형성되고, 이를 계기로 그 해 10월부터 남북체육회담을 열어 단일팀 준비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단체 구기 종목인 청소년 축구의 경우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차례 평가전을 치른 뒤에 단일팀을 구성했기 때문에 엔트리 축소로 인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온 민족이 열광적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평가전을 치렀기 때문에, 탈락자 발생으로 인한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반 국제대회에서는 단일팀이 성사된 데 반해 올림픽에서는 그동안 성사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동서독 단일팀이 1964년까지만 구성된 것과도 관련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순위를 국가별로 집계하지 않지만, 참가국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그렇게 한다. 금메달 숫자로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메달 합계로 매기기도 한다. 이를 통해 어떻게든지 국력을 과시하려 한다. 국가들의 극성이 심한 탓에 이 문제는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0년에 <한국레져스포츠학회지> 제4권에 실린 류준상의 '올림픽과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에 이런 말이 있다. 논문 제목 속의 '민족주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번역한 단어이므로 민족국가주의나 국가주의로 대치되어야 한다. 아래 인용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논문 저자가 '민족' 대신 '국가'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논문 저자 역시 국가를 지칭하는 의미로 민족주의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국가들은 올림픽에 있어서 스포츠의 성공을 통해 국가의 명성을 높이고 국민들의 자존심을 높여 주고 경제적 능력과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지위와 인정력을 강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올림픽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려 하기 때문에, 단일팀 협상에 임하는 국가들은 이 팀이 거두게 될 호성적이 자국 덕분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다.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단일팀을 구성하려다 보면 협상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고, 한두 종목도 아니고 전체 종목에서 이런 식으로 협상이 진행되면 협상 타결이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니, 1957년부터 단일팀 협상을 해온 남북한이 아직 한 번도 전 종목에 걸쳐 단일팀을 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서독이 올림픽 단일팀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다면, 동서독이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올림픽 단일팀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독 측의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1950년대부터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은 올림픽을 통한 체제 홍보의 유용성에 주목했다. 소련은 최초로 출전한 1952년 헬싱키 대회에서 금 22, 은 30, 동 19로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헝가리는 금 16으로 종합 3위였다. 잘 먹고 잘 지원해야만 딸 수 있는 메달을 공산권 국가들이 많이 회득했으니,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 국민들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독은 스포츠 강국이었다. 그래서 올림픽에 나가면 소련 못지않게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었다. IOC가 동독의 독일 대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독이 올림픽에 나가려면, 독일 대표권을 가진 서독과 단일팀을 이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부터 단일팀 구성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같은 시기의 북한도 동독처럼 단일팀 구성에 적극적이었다. IOC가 인정하는 '코리아'는 대한민국뿐이었으므로, 대한민국과 단일팀을 이루지 못하면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서독과 달리 당시의 남북한은 단일팀 구성에 실패했다. 동서독만큼의 체육교류가 없었던 것도 이유이지만, 1953년까지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였다.
동서독이 1964년까지만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그 후로는 동독이 단독 출전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동독은 1965년에 IOC 회원국으로 인정됐다. 그래서 그 후로는 단일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단일팀 구성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공산권 북방정책에 관여한 염돈재의 저서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에 이런 대목이 있다.
"동독은 문서상으로 완전하게 IOC에 가입되었고 1972년부터는 독자적인 국기·국가·휘장을 사용하며 단독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올림픽과 국가주의의 밀접한 관계 동서독 체육교류는 그 뒤에 더 활성화됐지만, 올림픽 단일팀만큼은 더 이상 구성되지 못했다. 올림픽과 국가주의의 관계는 그만큼 밀접하다.
북한은 1963년에 IOC 회원국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호 문제 때문에 한동안 논란을 벌였다. IOC가 인정한 국호는, 북한이 요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아니라 북한(North Korea)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회원국이 된 뒤에도 한동안 올림픽에 불참했다. 1969년에야 IOC는 DPRK란 국호를 승인했다.
만약 IOC가 1950년대부터 동독과 북한의 단독 참가를 인정했다면, 올림픽 단일팀 문제가 이슈화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단독 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두 나라를 단일팀 협상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두 나라가 단독 출전권을 얻은 뒤로는 단일팀 가능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탁구와 청소년축구에서 남북 단일팀이 비교적 쉽게 구성된 것은 올림픽을 위한 단일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비록 전 종목 단일팀 구성은 아닐지라도 일부 종목에서 단일팀을 구성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환경이 확연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평창 이후에도 남북한은 단일팀 문제로 계속 머리를 맞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단일팀에 관한 한, 남북한은 1950년대 때보다, 또 탁구·청소년축구 단일팀 때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단일팀이 아니라도 각자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으므로, 또 단일 국제대회가 아닌 올림픽은 국가적 위상과 직접 관련되므로, 전 종목에 걸친 단일팀 성사를 이루려면 앞으로도 계속 난관을 헤쳐가야 할 것이다.
1950년대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또 단일 국제대회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앞으로 남북이 올림픽 단일팀을 이루는 길은, 양쪽 정부 및 체육 당국과 선수들이 1950년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양보를 하는 한편, 선수 엔트리 축소로 인한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1991년 탁구·청소년축구 때 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특히 엔트리 축소와 관련해서는, 불이익을 받게 될 선수나 관계자들이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도록 명분을 조성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