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민청련동지회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위압과 폭력은 역전의 용사들인 민청련 사람들도 위축시켰다. 그러나 그에 눌리지 않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자 수감자들의 젊은 아내들이 그러했다. 앞서 연행된 김병곤의 부인 박문숙이 그랬던 것처럼,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과 이을호의 부인 최정순은 간데없는 남편들의 종적을 찾고자 동분서주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혜를 발휘했다. 수감자들이 언젠가는 검찰로 이관되리라고 예측하고 검찰청 문 앞을 하염없이 지키기로 했다. 변호사 김상철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 당시 검찰청사는 덕수궁 옆 서소문동에 있었다. 지하 2층, 지상 15층의 빌딩에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이 입주해 있었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위치한 5층이 길목이었다.
기적 같은 해후예측이 들어맞았다. 1985년 9월 26일이었다. 김근태가 어딘가로 끌려간 지 20여 일이 지난 때였다. 인재근은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극적으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김근태는 발에 힘을 줄 수 없는 듯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옆에서 형사들이 부축해서야 간신히 한 발씩 내딛는 형편이었다.
5층에서 4층까지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인재근은 물었다. "다치지 않았느냐?"고. 김근태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실을 얘기하면 아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지만 아내의 거듭된 물음에 마침내 결심했다. 김근태는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라고 짧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9월 4일 2번, 5일 1번, 6일 1번... 20일 1번, 도합 10번이나 고문을 당했는데, 온몸을 꽁꽁 묶어 놓고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를 하루 5~7시간씩 당했다. 20일 마지막 고문을 받은 뒤 오늘(26일)까지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도 발뒤꿈치, 팔꿈치는 짓이겨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라고 탈진한 목소리지만 뚜렷이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뿐이었다. 충격적인 진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김근태는 고문 행위가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증언했다. 가해자들이 결코 부인하거나 은폐할 수 없게끔, 고문 방법과 날짜를 특정했다. 얘기를 듣는 인재근은 숨이 막혔다. 고문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양말을 벗어서 아내에게 넘겨줄 때 드러난 남편의 발뒤꿈치는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