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민청련동지회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젊은 아내 박문숙은 그날따라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늦은 귀가야 자주 있는 일이고, 집에 안 들어오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느낌이 이상했다. 아침부터 아내 몸이 편찮은 것을 보고,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노라고 말하고 나갔지 않았던가. 늦은 밤, 문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길 여러 차례 되풀이하던 중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내는 무심코 집 옆에 낯익은 가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아내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온 사방에 연락을 하면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다녔다.
붙잡혀 간 김병곤은 민청련 출범 초창기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정책실에서 비상근으로 일했지만, 1985년 초에 결단을 내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상근 전업 활동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해 3월 민청련 제4차 총회에서 상임위원장에 선임됐고, 비공개 영역에서 연구 조사 업무와 민중운동 지원 업무를 지휘해 오던 터였다.
경찰이 노리는 표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민청련 집행국장 이범영도 체포 대상자였다. 그는 다행히도 체포망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추적을 피해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기나긴 수배 생활의 터널에 진입했다.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가족과 친지들은 삼엄한 감시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부인 김설이는 3교대 감시조 경찰에게 온종일 둘러싸여 꼼짝도 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였다. 거친 인상의 사복 경찰들이 거칠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가족을 위협했다.
그날 붙잡혀간 사람은 또 있었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도 연행되었다. 표적은 셋이었다. 경찰 수뇌부는 그들이 학생운동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그해 5월 투쟁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 투쟁이 그 정점을 찍었다. 정권 핵심부에게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긴요한 터였는데,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짓이었다. 정권 핵심부는 이 사건을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삼민투 배후에 민청련이 있다?김병곤과 황인성이 체포된 지 10일째 되던, 그해 7월 18일에 삼민투 수사결과 중간발표가 있었다. 일간 신문들은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발표 내용을 약속이나 한 듯이 대서특필했다. '용공, 좌경, 급진, 이적' 등과 같은 자극적인 글귀로 이뤄진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