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삶던 대형 가마솥 두 개가 보존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물.
이주빈
임금 대신 받은 고래고기 내다팔아 생계 유지한 흑산도 주민들 박씨는 "고래작업은 석탄으로 증기 보일러를 돌려서 수증기로 기계를 작동했고, 지금 예리 가산토건 자리가 일본 포경회사가 석탄을 실어다 싸두던 자리"라면서 "고래 해체 작업은 '싱구리 히보이' '다구리 히보이'가 고래를 바다에서 끌어올리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라고 했다.
박씨는 "포경회사 사업장에는 부서별로 사람들이 배치돼 있었는데 뼈 가공팀, 고래 수염(잇염) 가공팀, 껍질 가공팀, 고래기름 가공팀 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고래 해체처럼 힘든 칼질과 막노동은 조선인 직원이 하고, 일본인 직원들은 주로 관리사무팀에 배치돼 작업을 총괄했다고 한다. 잡아 온 고래를 해체하고 가공작업이 끝나면 원판선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고.
이 같은 증언은 1917년 간행된 <전남사진지>가 기록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전남사진지>는 "(포경선이 포획한 고래를)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직접 해체하여 적육, 지방육, 경근, 경수, 경유, 골분, 혈분 따위로 처리하여 운송선에 실어 식용품은 시모노세키(下關)로, 비료는 효고(兵庫)로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술증언자 박인순씨에 따르면, 고래 해체 작업이라는 힘겨운 노동을 한 조선인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현금 대신 '고래고기'라는 현물로 지급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엔 흑산도에 고래 요리집은 따로 없었어. 그러면 일제시대 땐 어떻게 해서 고래 고기가 유통됐냐? 일본 포경회사가 월급 대신 고래 고기로 줄 때가 있었거든. 그때가 바로 춘궁기야. 월급 대신 받은 고래 고기가 엄청 나. 그것을 흑산 사람들에게도 팔고 비금도·도초도, 목포에까지 가서 내다 팔았어. 그래서 예리 사람들은 춘궁기에 고래 고기를 먹고 살았다고 할 정도였지."
즉 임금대신 받은 고래 고기를 대흑산도 주민 혹은 비금도나 도초도, 목포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고래 고기를 내다 판 곳이 비금도와 도초도인 것은 두 섬은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고래고기와 쌀을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