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2월 6일 윤병세 외무부 장관이 독일 연방슈타지기록소를 방문했다.
연방슈타지기록소(BStU)
독일연방에는 연방슈타지기록소라는 정부기관이 있다. 1990년 2월에 문을 연 연방슈타지기록소에는 2012년 기준 1708명이 일하고 있었다. 슈타지기록 소장은 지금까지 예외 없이 동독시절 반체제인사로 내몰려 고초를 겪었던 유명한 반대자들이 맡아왔다. 개인파일 보관서가의 총연장길이만 무려111킬로미터. 여기에 통독당시의 동독인구 1700만 가운데 무려 600만 명에 대한 비밀정보파일이 180만 장의 사진과 슬라이드 자료와 함께 빼곡하게 꽂혀있다.
슈타지는 1989 년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서분쇄와 파기, 소각에 들어간다. 1989년 12월 4일 에르푸르트시의 슈타지 지부건물 굴뚝에서 평소와 달리 검은 연기가 올라온다. 슈타지가 문서소각공작에 들어간 사실을 직감한 시민들은 슈타지 건물로 몰려가 시설을 점거, 장악한다. 드디어 1990년 1월 13일 동독 호네커 정권이 무너지고 동베를린에 있는 슈타지 본부건물이 시민에게 점거됐다. 이 날로 동베를린 등 13군데에 있던 모든 슈타지 건물과 기록이 전적으로 시민통제에 들어가 모든 기록이 보존된다. 역사는 슈타지가 이때부터 기능을 멈췄고 1990년 2월 8일 공식적으로 수명이 다했다고 기록한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부터 한두 달 사이 슈타지가 밤낮으로 분쇄한 사찰기록은 보유기록의 5%가 넘는 4500만 쪽이었다. 문서분쇄기를 24시간 돌리다보니 대부분의 기계가 열을 받아 며칠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났다. 이때부터 슈타지 직원들은 서류를 손으로 찢어서 자루에 담는다. 운 좋게 불태운 서류도 있지만 미처 소각하지 못한 대부분의 파손분쇄기록이 1만6000자루 가득 남아있는 상태였다. 1995년부터 연방슈타지기록소는 6억 조각으로 찢어진 이 자루기록의 완전한 복원을 진행 중이다. 분쇄기가 고장 나서 손으로 한번 찢고 자루로 들어간 서류처럼 복원이 용이한 서류도 일부 있지만 분쇄기에 잘게 잘린 기록도 많다. 완전한 복원까지는 앞으로도 최소한 20년 이상 소요될 전망이다.
호네커가 실각하고 드 메이지에르가 동독의 과도정부를 맡던 시절부터 동독인들은 슈타지 기록을 어떻게 처리할 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봉인파와 개방파는 각각의 논리로 무장했지만 개방파들이 승리했다. 주로 동독의 기득권세력들로 구성된 봉인파들은 슈타지 직원에 대한 보복위험과 사회분열을 우려하며 봉인을 주장했다. 개방파들은 시민들의 알권리와 과거청산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동독지역 시민들은 물론 서독지역 시민들도 개방론자의 손을 들어줬다. 1991년 말 연방슈타지기록법이 통과됐고 그에 따라 1992년 1월 2일, 베를린 소재 슈타지기록소가 시민의 신청을 받아 본인문건공개를 시작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2015년까지 290만 명이 넘는 구동독출신 시민들이 본인의 슈타지 파일을 공개신청하고 열람했다. 2014년에도 4만1천 명이 본인기록 열람을 신청했다. 외국인도 본인에 대한 슈타지 파일 열람을 신청할 수 있다. 동독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티모시 가튼 애시(Timothy Garton Ash)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파일내용을 소재로 책을 펴냈다. 2015년 1월 9일부터는 슈타지 파일의 아주 작은 일부가 온라인으로 모든 시민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2500쪽의 사찰기록, 250개의 사진자료, 6시간 길이의 녹음, 15시간의 다큐 필름이 그것이다. 밀케가 동독시민 중 국외여행자를 다루는 방법을 90분간 특강한 녹음테이프도 들어있다.
시민들은 자신에 대한 슈타지 파일을 직접 열람하고 복사를 요청할 수 있다. 1991년 겨울 독일정부가 슈타지 파일에 대해 비밀분류를 해제할 때 사찰당한 시민에게 본인기록접근권한을 주는 문제와 함께 언론에 취재목적의 기록접근권한을 주는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결과적으로 첫째, 18세 미만 청소년이나 전직 슈타지 직원에 대한 파일은 언론에 공개하지 않으며, 둘째, 다른 정보파일에 대해서는 언론의 취재요청이 있으면 공개하되 개인정보를 지우고 준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본인사찰기록 확인 당시의 다양한 반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