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순 한글신문 <권업신문> 1914년 8월 16일 자는 "흑산도에서 유리 만드는 흙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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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근해에서 살던 큰 고래들을 포획하기 위해 흑산도에 포경근거지를 설치했던 일제. 일제가 흑산바다에서 수탈해간 것은 고래만이 아니었다.
1914년 8월 1일자 <매일신보>에 '조선의 일대유리(一大遺利), 흑산도의 규사 발견, 초자제조계(硝子製造界)의 대복음(大福音)'이라는 기사가 뜬다. 흑산도에서 규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조선에게 크게 유리한 일이며 초자 즉 유리를 만드는 제조업계에게는 큰 복음이라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보름 후인 1914년 8월 1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 한글로 발행되던 <권업신문(勸業新聞)>에 '유리 만드는 흙을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전라남도 다도해 중에 있는 대흑산도에 초자를 제조하는 규사가 있는 것을 일찍이 어느 약장사가 발견하여 이것을 가져다가 분석하여 본 즉 초자제조에 매우 아름다운 재료가 된 것을 발명한바, 일인 초자회사에서 발견자에게 돈을 주고 이 규사 광을 사서 일변 공장을 설하고 규사를 취급하기로 착수하였는데 우선 회사에서는 이 흙의 운수를 시작하였는바 이 섬의 규사는 한량없이 많아서 한국에는 재원이 발현되었다더라."<권업신문>은 1911년 동포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의 기관지로, 1912년 4월 창간되었다. <권업신문>은 주 1회, 매주 일요일에 1400부를 발행했는데 신채호·이상설 선생 등이 주필로 활동하였다.
안팎에서 발행되고 있던 신문들이 일제히 흑산도에서 규사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는 1914년. 1914년 7월 2일자로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제575호에는 '각지의 이번 달(5월) 무역개황 - 목포항 편'에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는 "이번 달 목포항 수출액은 5만 9143원, 수입액은 16만 3813원으로서 전월에 비해 수출은 8만5302원이 감퇴하였으나 수입은 5899원이 증가하였다"면서 "수출 감퇴의 원인은 일본 시세의 하락으로 쌀 수출이 전월에 비해 5만1421원의 감소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언급한다.
"이달에 처음으로 규사가 수출되었는데 이는 '오사카의 '오사카-아마가사키 아사히글라스주식회사(大阪尼崎旭硝子株式會社)'가 전남 대흑산도의 천연산 규사를 공장 소재지인 큐슈 도바타(九州 戶畑)로 보내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는 특히 목포 경유 대흑산도와 일본 와카마쓰(若松) 간의 정기항로를 개시하고 이달 30일부터 규사 300톤 450원을 처음으로 이출하였다. 규사는 대흑산도에 무진장으로 있으며 일본산(日本産)에 비하여 품질이 우량하여 초자원료(硝子原料)로 가장 유망하므로 금후 매월 약 1,000톤 채취 수출을 계획하고 있다."
즉 조선총독부 관보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일제는 1914년 5월 처음으로 흑산도에서 규사 300톤을 채취하여 공장이 있는 일본 큐슈 도바타로 보냈으며, 이후에도 매월 1천 톤을 채취해 보낼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규사 이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제는 목포를 경유하는 흑산도와 일본 와카마쓰(若松) 간의 정기항로를 개시했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