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련이 창립한 직후인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아웅산 묘소가 폭발한 직후 모습
민청련동지회
그러나 사실 언론에 노출된 사건보다 더 큰 시련이 전두환에게는 있었다. 정치활동 금지로 꽁꽁 묶어둔 김영삼이 급기야 단식투쟁으로 항거했고, 그 사실이 언론에는 '현안 문제'라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사건으로만 보도되었지만, 사람들의 귀에서 귀로 구전되면서 정말로 전두환에게 '현안'이 되어갔다.
더욱 큰 시련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반정부투쟁이 끊이지 않고 불타올랐던 것. 이것이야말로 전두환에게 진짜 시련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모종의 유화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연말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전면 복학 조치를 내놓기에 이르렀던 터였다.
'유화국면'과 복학투쟁운동권의 처지에서도 1984년은 연말에 발표된 복학조치가 초래한 논란으로 뜨겁게 시작되었다. 운동권에서는 제적생 복학조치를 '유화조치'로 불렀고, 5공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정세를 '유화국면'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궁지에 몰린 5공이 운동세력에게 숨통을 트여 줌으로서 저항의 기세를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심산에서 나온 고육책이라는 판단이었다.
따라서 1984년이 밝아오자, 학생운동 출신자들로 구성된 민청련 안에서는 복학 조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민청련이 대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의 논쟁은 엄청난 열기를 토해냈다.
복학 거부론의 기본 논지는 이 조치가 기본적으로 5공의 수명 연장을 위한 기만적인 제스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가장 선명하게 밀고나간 민청련 간부로는 기대(기별대표) 모임을 이끌던 이범영을 꼽을 수 있다.
이범영은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굵지만 윤기있는 목소리로 정세에 대해 또한 활동방향에 대해 조리있게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노가리'였다. 그는 매월 1회의 정기 기대 모임을 소집하고 공개된 집행부의 활동에 대한 보고와 정세에 대한 토론을 주재했다. 또한 각 기별 모임에서 제기된 의견과 기별 모임에서 거둔 회비를 집행부에 전달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1984년 초의 기대 모임에서는 복학 문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범영은 복학 거부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기대 모임에서 이런 취지로 말했다.
"저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왜 받아먹어야 하는가. 한 번 뒤로 물러서면 자꾸 물러서게 된다. 복학을 해서 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복학한 이들을 통제하고 지휘할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복학은 우리 운동력의 손실만 초래할 것이다." 열혈 투쟁가였던 이범영은 안타깝게도 1994년 담도암으로 4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반해 복학 수용론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에서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서울대의 경우 78학번들(민청련 출범 당시 78학번은 가장 어린 막내세대였다) 사이에 수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이 대표적이었다.
수용론의 논지는 이 복학 조치 자체는 운동의 힘으로 5공을 압박해 쟁취한 성격이 있으므로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결코 투항이 아니며 학교라는 투쟁의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5공에 굴복해서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싸우러 들어가는 거다. 80년 5․17 때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간 것이 늘 부담이 됐었다. 이번엔 감옥 가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겠다."실제로 그는 복학했고, 복학생협의회를 이끌며 학생운동의 대열에 섰다. 그해 가을에 서울대 안에서 이른바 '학내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기꺼이 그 책임자의 일을 떠맡았다. 그리고 그 일로 감옥에 갔으니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킨 셈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읽혀지는 명문장이 되었다.
어쨌든 논쟁은 뜨거웠지만, 민청련은 복학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민청련이 각 대학 학생운동의 연합체인 점에서 어느 한 쪽을 두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 집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