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령산 수리바위에서 본 풍경.예부터 축령산은 골이 깊고 산세가 험해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독수리가 많았다고 한다.
이명수
젊었을 때는 도시적인 환경과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대자연에 마음이 더 쏠린다. 도시의 외관은 빛나고 화려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요지경 속이다. 너무 탁하고 시끄럽고 각박하고 살벌하다. 세상인심은 또 어떠한가? 참으로 변덕스럽고 박정하다. 여측이심(如厠二心), 즉 뒷간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확연히 다르다. 이해득실의 저울질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돈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의 삶은 녹록지 않다. "돈이 말을 하면 진실은 침묵한다"라는 서양 격언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진리에 가깝다. 대다수 서민은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이 많다. 문학청년 시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짬짬이 밤잠을 설치며 습작을 할 때는 등단만 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등단을 하고 한 권, 두 권, 세 권... 열 권이 넘는 책을 내고도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작품을 쓸 때는 항상 중국 진나라 때 무명의 문인 좌사(左思)가 <삼도부>(三都賦)라는 저작을 발표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고사처럼 나도 대한민국의 종잇값을 한껏 올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재주가 거기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고 운도 따르지 않았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작품만 써서는 처자식을 생활고에 시달리게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밥벌이 일자리를 찾아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를 전전했다. 고용이 불안정한 업계 환경에서도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일했지만, 생활비와 교육비 등을 제하면 늘 빠듯했다.
급여생활자로 살아가며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족의 생계가 걸린 돈벌이를 위해 온갖 모멸감을 꾹 참고 견디어야 하는 순간이 많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긴장과 삶의 불안 속에서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혈압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장기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 몸속에서 독소를 뿜어내어 병을 만든다.
내 경우는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가장 많고 제일 고약한 것 같다. 세상에는 방귀 뀐 놈이 성을 내기도 하고, 도둑이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황당한 일도 왕왕 있다. 내 실수가 아닌 것을 가지고 질책을 당할 때면 기분이 참 더러워진다. 또한, 자질구레한 일로 자꾸 싫은 소리를 들을 때는 직장인의 비애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날은 술 한 잔 마시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고 해보았지만, 몸만 상하고 뒷맛이 개운치가 못했던 때가 더 많았다.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그래서 혼자 속으로 삭이곤 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세상사에 지칠 때는 사람 외적인 것의 위안이 필요하다.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이 없는 조용한 숲속이나 바닷가 같은 자연 속에 파묻히는 것이 효과적이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흙을 밟고 걸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 보면 적잖은 위안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야외로 나간다. 회색빛 도심에서 벗어나 확 트인 자연 속에 있으면 우선 눈부터 시원해지면서 덩달아 마음마저 시원해진 느낌을 받는다. 바람에 실려 오는 싱그러운 풀냄새,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들, 꽃 사이로 날아다니는 벌 나비, 변화무쌍한 구름, 천변만화하는 산의 모습,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물 위에 반짝이는 햇살,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 이 모든 것들은 공해에 찌들고 세상사에 지친 몸과 마음에 안정을 준다. 자연 속에 있으면 "아, 좋다! 아, 살 것 같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터진다. 바로 자연이 주는 효과이고 치유력이다.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날씨가 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해도 24절기는 어김이 없다. 때가 되면 알아서 기온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서 말 없는 가운데 제 할 일을 빈틈없이 해놓는다. 자연은 가장 정직하고 부지런하다.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거나 눈속임하는 법이 없다.
나는 창조니 진화니 하는 생명의 근원설(根源說)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흙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다가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이 가장 깊게 공부해야 할 위대한 책이며 최고의 스승이다.
대자연의 넉넉한 품속에서 성찰의 시간을 갖고, 깊은 위안과 삶의 활력을 찾으면서 야생화를 비롯한 자연 생물에 관심이 생겼다. 이름을 모르는 꽃을 보면 그 이름이 궁금하여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에게 묻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적었다. 20세기 대표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현상을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사실 꽃 이름을 안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서를 무척이나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