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사랑한다>.
MBC
충선왕은 몽골인 왕비의 몸에서 출생한 최초의 고려왕이다. 그는 순혈 고려인인 아버지 충렬왕을 상대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는 1298년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고 왕이 됐다가 7개월 만에 도로 빼앗겼다. 그 뒤 몽골 수도에서 생활하던 중에 10년 만인 1308년, 아버지가 죽자 고려로 돌아와 제2차로 왕위에 등극했다.
아버지와 투쟁을 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과도 정쟁을 벌였다. 세자가 된 아들이 자기한테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자, 세자를 죽이고 둘째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 둘째아들이 충숙왕이다. 충숙왕이 낳은 두 아들이 충혜왕과 공민왕이다. 충혜왕은 MBC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했다. 배우 주진모가 충혜왕을 연기했다.
제2차로 등극한 지 2개월 뒤 충선왕은 개경을 버리고 몽골 수도 대도(大都)로 돌아갔다. 외갓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몽골 생활에 익숙해져 고려 생활이 불편했던 탓이다. 대도는 지금의 베이징 절반과 그 위쪽에 걸쳐 있었다. 그는 거기서 원격으로 고려를 통치했다. 스마트폰 화상통화도 없던 시절에 인편을 통한 원격 통치를 했기에 고려 지배층의 빈축을 많이 샀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보나 근무 자세로 보나 충선왕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 분야에서만큼은 꽤 선명한 업적을 남겼다. 신진사대부가 기반을 잡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놓은 것이다.
1298년 제1차 즉위 당시, 고려 정부에 문한서(文翰署)란 관청이 있었다. 임금 명의의 문서를 작성하는 기관으로, 실력은 있으되 가문이 약한 선비들이 주로 근무하는 곳이었다. 관직제도를 정리해놓은 <고려사> 백관지에 따르면, 문한서에 대해 충선왕은 이런 조치를 내렸다.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문한서가 관리 선발을 주관하도록 했다. 얼마 후에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치고, 왕의 명령을 내보내는 임무를 맡겼다."충선왕은 인사권을 행사하는 정방을 폐지한 뒤 그 권한을 문한서에 주었다. 그리고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개칭한 뒤, 왕명 출납권까지 주었다. 비서실 기능까지 부여한 것이다.
충선왕의 조치는 사림원에 근무하는 '배경 약한' 선비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1년 발행된 <역사학보> 제52집에 실린 이기남의 논문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의 문투를 지금에 맞게 수정했다.
"사림원의 구성원들은 모두 문과 시험에 급제해서 출세한 인물들이며, 대부분이 지방 출신의 신진세력이었다. ······ 주요 가문에 끼지 못하여 신진세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지방 출신의 신진 선비, 즉 신진사대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충선왕의 노력은 충숙왕한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진행됐다. 1308년 제2차로 즉위했다가 1313년 양위한 충선왕은 대도에 만권당(萬卷堂)이란 학술기관을 세웠다. 상왕이 된 그는 이곳에 진귀한 서적들을 모아둔 뒤 고려인과 중국인 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양쪽들이 학술 교류를 하도록 만들었다. 몽골 치하의 중국인 학자들이 거둔 학문적 성과가 고려 학계로 유입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활동한 대표적 학자가 이제현이다. 이곳을 통해 고려에 유입된 유교 철학의 분파가 성리학이다. 세계 정치의 중심인 몽골 수도 대도에서 고려 상왕이 신진사대부들의 학문을 지원했으니, 고려 본국에 있는 신진사대부들의 입지도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신진사대부의 대부인 이색이나 그의 제자들인 정도전·정몽주 등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1351년 등극한 공민왕이 구세력을 내몰고 신진사대부를 새로운 지배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공민왕이 신진사대부를 지배층으로 만든 것은 할아버지 충선왕의 노력을 완성시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