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주민복지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관악사회복지 개소식 모습. 사회자 옆이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 초대 이사장과 왼쪽 두 번째 박승한 상임이사, 바로 옆에 송경용 신부.
관악사회복지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행상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봉의 교사 월급으로 6남매를 키워야했던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생선 값을 깎으려 했고 아주머니는 못 깎아준다면서 실랑이를 하다 흥정이 깨지고 만 것입니다.
함지박을 이고 돌아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그는 뒤쫓아 가 자신의 용돈을 드리면서 깎지 않은 가격으로 다시 흥정할 것을 부탁하면서 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가난한 행상 아주머니 모습이 떠오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1993년 송경용 신부를 만났습니다.
봉천동 나눔의 집 송경용 신부와 난곡 주민운동가인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 당시 관악구의회 의원과 조흥식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관악의 많은 활동가들이 가난한 주민을 위한 조직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봉천동과 난곡 등의 달동네가 재개발로 인해 주민공동체 거점이 사라지면서 빈민운동의 새로운 변화가 요구된 가운데 주민복지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비로소 그의 자본이 빛을 발했습니다.
"송 신부가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돈이 있으니 나는 돈을 내겠다. 당신들은 빈민들을 위한 주민복지운동을 하시라'고 하면서 아무 조건 없이 3천만 원(현재 3억 원가량)을 드렸습니다. 자금을 대긴 했지만 빈민운동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착한 자본가 정도는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의 소박한 꿈은 착한 자본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벼룩시장> 지면에 주민운동을 소개하고, 운영비를 대고, 활동가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빈민운동을 측면 지원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군자금을 모집했습니다. 군자금이 독립운동가 육성과 항일투쟁의 젖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악지역 빈민운동 자금책을 자청한 그는 1995년 창립한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 초대 이사로 참여했습니다.
군자금 모으러 나서는 독립운동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