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한국문화박물관에서귀국을 앞둔 하담
고기복
새벽 5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쌩쌩 달리는 차량들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하담은 조금만 길이 밀리는 기미만 보여도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출국 수속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말해도 행여나 비행기를 놓치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며 싱긋 웃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출국 예정 시간까지 네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급한 사람이 어떻게 귀국일자가 잡히기까지 참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는 쌍둥이 동생이 귀국했던 1월에 같이 귀국했어야 했다. 하지만 눈이 침침해지는 증상과 뇌동맥 손상으로 잠을 못 자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눈과 뇌동맥류 수술을 받는 동안 3년 반을 일했던 회사에 퇴직금을 요구했다. 사장은 "외국인이 무슨 퇴직금이야. 와서 일하든가, 그냥 집에 가!"라고 깐죽대며 지급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하담은 어쩔 수 없이 입원해 있는 동안 노동부에 진정했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하담은 가슴이 철렁했다. 결국 어찌될지 모르는 퇴직금을 뒤로 하고 귀국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빨리 처리되기를 기대했던 진정 사건은 보통 2주 안에 출석 요구가 나오는 것과 달리 3주 만에 나왔다. 근로감독관이 출석 통보를 늦게 한 탓이었다. 게다가 첫 출석에 사장이 나타나지 않아 또 한 주를 기다려야 했다. 다른 사건 같으면 보름 전에 끝날 사건이었다. 하담은 출국일을 하루 앞두고 퇴직금을 받았다. 원래 받아야 할 금액의 절반을 약간 넘는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 병원비를 빌려준 사촌 동생 부부와 친구들에게 갚았다.
공항에 도착한 하담은 출입국에 여권과 당일 항공권을 들고 자진출국 신고를 하러 갔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많은 외국인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출입국에서는 '체류행적 조사'라 해서 지난 5년 동안 일했던 회사 이름과 연락처, 근무 기간 등을 적으라고 요구했다.
하담은 난감했다. 비록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고향 친구들이 일하는 곳이라 적어 내면 사장 말고도 친구들이 곤란을 겪을 건 뻔한 일이었다. 하담은 눈치를 보다가 입국 후 처음 배정 받았던 회사와 수술 받았던 병원들, 퇴원 후에 잠시 머물렀던 이주노동자쉼터 주소를 적어냈다. 출국 심사를 담당하는 직원은 뭔가를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대답을 않자 다음 사람을 불렀다.
하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출국시키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체류행적을 빈칸으로 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큰 탈 없이 출국 허가를 받았다. 출국 신고를 마친 하담은 귀국비용보험을 찾으려고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먹통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비행기 환불 비용보다 더 큰 문제, 그것은 인륜의 문제였다귀국비용보험은 이주노동자들이 체류기간이 만료되어 귀국할 때 필요한 비용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입국 후 3개월 이내에 가입해야 하는 보험이다. 가입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국내 입국 후 취업교육 중에 개설한 통장으로 자동 이체하여 가입하도록 하고 있다. 하담은 첫 달 월급에서 40만원을 지급했기 때문에 공항에 가기 전에 지급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귀국비용보험을 납부한 후부터 5년 동안 통장을 사용하지 않아 발생했다. 휴면계좌가 돼 버린 것이었다. 하담은 귀국비용보험 지급 신청 후에 KEB하나은행 용인지점에 들러 휴면계좌를 되살려 줄 것을 요청했었다. 은행에서는 신분을 확인하고는 통장번호를 프린트해 주면서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고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