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주변 나라를 여행한 공자와 제자
김기동
그런데 이게 모두 돈이 드는 일입니다. 사립대학교를 운영하는 일이나, 제자를 데리고 14년간 여행을 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경비가 필요합니다. 그럼 이 경비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다행히 공자에게는 '자공'이라는 사업가 기질을 가진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자공'은 이런저런 사업 수완을 발휘해 경비를 조달합니다.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공자는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러 나라를 여행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건 '자공'의 경제적 도움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묘 대성전 건물에는 공자의 제자 16명의 위폐도 함께 있는데, 16명 중에 '단목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단목사'는 바로 '자공'의 원래 이름입니다.
논어는 제자들이 묻고 공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논어에 '자공'의 이름이 모두 서른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횟수입니다.
그러면 '자공'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까요? <논어>에는 '자공'이 보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이런 기록을 근거로 중국 학자들은 '자공'이 공자와 같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석 판매 사업을 했을 거로 추측합니다.
공자는 '인(仁)'을 주장하면서 '인(仁)'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예(禮)'를 말합니다. 이런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한 나라는 없었지만, 공자는 이런 사상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생각이 깊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을 겁니다. 조금 험하게 표현하자면, 공자는 유능한 사람은 아니지만, 남에게 사기 치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은 거지요.
공자가 얻은 이런 신뢰의 평판을 브랜드화하여 보석 판매 사업을 한 사람이 바로 '자공'입니다.
전쟁을 치르며 나라가 없어지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춘추시대에 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겁니다. 이런 아사리판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정직'이라는 이미지를 얻은 '공자'라는 브랜드는 특히 가짜가 많은 보석을 판매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이런 공자의 신뢰 이미지를 사업에 활용한 유능한 기업가입니다.
공자가 죽고 나서 제자들은 공자의 무덤 곁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했습니다. 3년이 지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떠났지만, '자공'은 혼자 공자 무덤 곁에 머물며 3년을 다시 시묘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공'은 6년 동안 공자의 무덤을 지킨 셈이지요. 공자를 모시는 '자공'의 정성이 대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자라는 브랜드를 독점하기 위해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