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2>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한겨울 언 땅이 녹고 새 봄이 찾아오면 우선 할 일은 또 그 다음 겨울을 날 식재료를 준비하는 일. 농촌에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년 후의 양식을 미리 준비하며 씨앗을 뿌리고 흙을 이기고 잡초를 베다 재료를 수확하면 갈무리해 저장을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다음 시간을 준비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것. 언 땅이 녹기 시작할 즈음이면 이제 저장해둔 말린 채소도, 새로이 수확할 채소도 마땅치가 않다. 끝물이라 달만큼 달아진 저장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이치코는 옛, 썸 아닌 썸이었던 남자아이와의 일화를 떠올린다.
여느 시골아이가 그렇듯,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상경한 이치코는 홀홀단신 자취방을 구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간다. 당연히 살림살이가 넉넉치 않아 매일의 끼니를 인스턴트로 때우다 채소라도 먹을까 싶어 작은 화분에 래디쉬를 심는다. 래디쉬는 한 달 만에도 자라니까. 일하는 곳에서 말을 주고 받게 된 남자아이가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걸 본 그녀는 고향에서 재배한 쌀에 된장을 발라 구운 주먹밥, 직접 키운 래디쉬 절임, 계란말이 도시락을 싸지만 건네주기 직전, 우연히 남자아이들의 잡담을 듣고 손을 거둔다.
손으로 직접 뜬 머플러 선물이 집착으로 느껴진다는 둥, 선물 정도는 돈 주고 제대로 된 걸 달라는 둥 그런 이야기들. 그런 철없는 애들이야 별 볼 일 없다는 걸 주인공도 알고 있다. 래디쉬라도 키웠듯, 어느 상황에서도 삶을 가꿔나갈 줄 아는 주인공 이치코는 마땅한 식량이 없는 초봄에도 꽤나 근사한 음식을 해 먹는다. 눈이 녹아 질어진 흙에서 제일 먼저 고개를 드는 머위와 산달래, 그리고 파종을 놓쳐 결구하지 못한 채 겨우내 눈밑에 숨어있다 꽃봉오리를 내는 배추다. 이치코는 이 배추 꽃봉오리와 산달래, 송어로 봄맞이 파스타를 만든다.
시골에서의 이런 삶이 언뜻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일당을 벌기 위해 동창 친구와 곤들매기 양식장의 일을 도와주며 곤들매기를 퍼나르고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아 죽여 식사를 하며 친구가 하는 말, 그가 도시에 살지 않는 이유는 뜨끔하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척이나 하는, 타인이 만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기만 하는 인간일수록 잘난 척만 하지. 천박한 인간의 멍청한 말을 듣는 게 이제 지긋지긋해졌어. 난 말야, 타인에게 죽여달라고 하고는 죽이는 법에 불평하는 그런 인생을 보내기가 싫어졌어."도시에 사는 우리는 남이 만든 것에 이러쿵 저러쿵 말이나 보태며 살아간다. 내 취향은, 안목은 꽤나 훌륭하니까, 이런 건 촌스럽고 이런 건 괜찮아, 소비를 통해서만 자아를 형성한다. 이것은 1차 생산자나 창작자라는 직업만이 귀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진짜 감정과 생각을 위해. 그것이 두려워 대충 퉁치고 합리화 하는 이의 표정은 나이가 들수록 비겁해진다. 가끔 삶에 회의가 들면 어디 시골로 훌쩍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거기에 땡볕에 얼굴이 타들어가고 다리에 거머리가 달라붙는 일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디에서건 정말 아름다운 것은 쉽게 얻어지는 법이 없다.
보통은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을 인생에서 도망치는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 반대로 열심히만 사는 것도 인생에서 도망치는 행동일 수 있다. 주인공 이치코의 고민도 그것이다. 혼자 열심히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녀는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껴 무작정 상경했던 것처럼, 또다시 고향으로 도망쳐 온 것은 아닐까? 그걸 보는 친구도 이야기한다.
"실은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것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속이기 위해 그때그때 열심히 얼버무리는 거 아니야? 사실은 고민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살며 도망치고 있을 뿐 아냐?"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결정'하고 싶어한다. 사실 편하게 생각하면 편하게 생각할 문제이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인생을 더 어렵게 사는,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아름다운 사람이다. 결국 그녀는 또 다시 시골을 떠날 결심을 한다. 봄이 왔지만 그해 겨울에 먹을 감자를 심지 않는다. 그녀가 처음 귀향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보냈던 편지 내용은 이렇다.
"무언가 실패를 하고 지금까지의 내 자신을 되돌아 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일로 실패를 하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곳을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어서 침울해지고... 하지만 난 경험을 많이 해봤으니까 그게 실패건 성공이건 완전히 같은 장소를 헤매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원'이 아니라 '나선'이라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조금씩은 올라갔던지 내려갔던지 했을거야. 그럼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근데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일지도 몰라. 같은 곳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물론 옆으로도... 내가 그리는 원도 차츰 크게 부풀고 그렇게 조금씩 '나선'은 커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더 힘을 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실패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라도 나아가는 나선형의 인간, 주인공은 자신이 있을 곳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려, 고민을 마무리하기 위해 시골을 떠난다. 아니 애초에 삶의 고민은 끝이 없는 것이지만 그 고민을 멈추지 않을 때야 비로소 나선형의 인간은 앞으로든 옆으로든 나아간다. 결국 주인공은 몇 년 후 시골로 돌아오지만 그 전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 만화가 아름다운 건 단순히 시골의 사계와 그 계절감이 듬뿍 담긴 요리가 근사해서도 있지만, 그 안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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