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 부분의 시어머니(김해숙 분).
SBS
시어머니 홍씨 입장에서 볼 때, 사임당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며느리였다. 강릉의 명문가 출신에다가 선비들의 극찬을 받는 저명한 화가였다. 거기다가 자기 아들 이원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성실성과 꼼꼼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사임당은 대하기 어려운 며느리였다. 그런 며느리가 결혼 후 19년간 따로 살았으니, 홍씨한테는 사임당이 항상 어려웠을 것이다. 사임당이 시집에 다시 들어갔을 때, 홍씨는 너무 연로해서 기력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시어머니 행세를 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그로 인해 며느리 대하기가 더욱더 어려웠을 수도 있다.
홍씨가 사임당을 얼마나 의식했을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 이런 일화는 스물한 살 때 시집에 잠깐 머물렀을 때도 생산됐고, 시집에 완전히 들어간 서른여덟 살 이후에도 생산됐다.
스물한 살, 잠깐 머물렀을 시절이다. <선비 행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시댁의 문중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유독 사임당만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예의를 지키느라 그랬을 수도 있고, 대화가 재미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림에 대한 생각에 빠져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떤 생각에서 침묵을 유지했건 간에, 아직 새댁이랄 수 있는 며느리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과묵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의에 어긋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좀 심했던 모양이다. 한마디 해야 할 상황에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 홍씨가 "며느리는 왜 말이 없느냐?"라고 물어봤다. 말 좀 해보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임당의 반응이 좌중을 무겁게 만들었다.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선비 행장>에 따르면, 사임당은 무릎을 꿇더니 "여자는 문밖을 나가지 않아서 보는 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점잖게 대답했다. 겸손의 표시로도 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웃고 떠들던 친척 여성들을 무안케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문밖을 나가지 않아서 보는 것도 없었을 여인들이 뭔 말이 이리 많으냐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친척 여성들은 사임당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웃고 떠든 행위를 반성하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젊은 새댁의 정중하면서도 당돌한 발언이 자신들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을 수도 있다. 그런 모습이 부끄러움 같은 것으로 표현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집 대문을 나서면서 친척 여성들이 뭐라고 수군댔을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린 게 당돌해!"라는 식의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다.
'현모양처'라는 틀에서 벗어나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