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중절모에 목도리, 두툼한 잠바까지 완전무장한 줄 알았는데, 아뿔싸! 슬리퍼. 보기만 해도 발이 시리다.
고기복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베란다에 빨래를 놔뒀다간 언제 마를지 모를 일이었다. 대한민국 겨울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리차드와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다독여 옥상으로 올라갔다. 간밤에 내린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지만, 볕은 눈에 반사된 탓도 있었겠지만, 눈부실 정도로 좋았다. 그렇게 최강 한파에 얼린 빨래는 옥상에서 추위를 녹여야 했고, 슬리퍼를 신고 옥상에 오른 이주노동자들은 눈을 말아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은 눈사람을 만들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빨래를 널고 방으로 들어간 리차드는 머리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추워요' 하며 하하 웃었다. 담요 아래로 손을 넣어 보았다. 전기 패널을 사용하는 바닥은 장판이 눌어붙을 정도였다. 뜨끈한 아랫목이 부러울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지난 금요일, 누군가 담요를 빨았던 날, 낮에 전해 준 소설책을 다 읽었는지 물었다.
"저는 다 읽지 못했어요. 윌리는 다 읽었어요. 제 책이 조금 두꺼워요.""그래요. 다 읽으면 말해요. 다른 책도 있으니까.""추울 땐 책만 읽으면 좋겠어요. 나가기 싫어요." 대개 쉼터를 이용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긴긴 겨울밤을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지낸다. 그들에게 얼마 전 한 후원자가 보내온 책을 권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비롯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 '레미제라블', '오만과 편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었다. 다 읽은 사람도 있고, 리차드가 반 이상을 읽은 걸로 봐서 금요일에 읽기 시작한 것치고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다들 독서삼매경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