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7명에 이르는 조선국왕의 묘호
유영호
먼저 묘호를 짓는 데 있어서 <예기(禮記)>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 그 기본원칙에 따르면 '가계의 시조는 조(祖)가 되고, 그 후예는 종(宗)이 된다'. 이를 종법원리라 하며, 부수적 원리로 '공(功)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 된다'는 조공종덕(祖功宗德)이 있다.
종법은 적장자가 종자(宗子)의 지위를 상속하는 제도다. 따라서 왕조를 건국한 시조는 태조라 칭하고 그를 계승하는 왕은 '종'이라 불러야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셈이다. 이것이 묘호의 권위요 왕권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원칙에 따르면 조선도 묘호로 '조'가 쓰이는 사람은 고려의 태조 왕건처럼 한 명 뿐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조선에서는 종법원리보다 조공종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즉 '원칙보다 예외가 중시되었다'고나 할까?
인조 역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인조가 죽고 그의 묘호 문제가 '인종'이 아닌 '인조'로 결정되자 홍문관 심대부가 이보다 앞선 세조, 선조, 중종의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은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이 있지 않았습니다. 창업군주만이 홀로 '조'로 호칭됐고, 선대의 뒤를 이은 그 밖의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조'를 칭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대왕의 경우도 (형인) 문종의 계통을 이어받았는데 '조'로 호칭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대왕이 '조'를 칭한 것도 의리를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중종대왕은 연산군의 더러운 혼란을 평정했지만 '조'가 아닌 '종'으로 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 <효종실록> 중에서하지만 인조의 아들 효종은 이러한 상소를 "망령된 의논"이라며 물리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창업군주만 '조'를 쓰는 원칙을 약화시키고, 공이 있는 군주에게도 '조'를 쓸 수 있는 예외규정을 적용했다면 과연 인조에게 무슨 공이 있었단 말인가?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배척하고 친명외교를 고수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당시 인조라는 묘호를 주는 것이 맞다는 측의 주장은 '반정을 통해 종사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으며, 윤기(倫紀)를 회복시킨 공이 있으니 조를 칭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 때 굶주린 백성들이 무척 많아 이들의 해골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될 정도였다.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다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는 '차라리 광해군 시대가 낫다'는 저주에 가까운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인조 역시 사과문까지 발표하게 된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이다. 하기야 뭐든지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법이다. 인조에 앞선 선조의 경우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쳐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지만 그에게 '선종'이 아닌 '선조'의 묘호를 주장하는 자들은 오히려 선조가 임진왜란을 다스렸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원칙 없이 정해진 조선국왕의 묘호는 참으로 헷갈릴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도성 기행을 출발할 때 만났던 계유정난의 주인공 수양대군이 다시 떠오른다. 그의 묘호가 '세조'가 된 것은 어쩌면 조선의 후대국왕들에게 이정표가 된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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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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