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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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이 된 신라, 체질개선 작업이 있었다신라는 고구려·백제에 비해 체력이 약한 나라였다. 6세기 초중반까지도 경상북도에 국한된 작은 나라였다. 거기다가 소국 연맹체제로 운영되는 허약한 나라였다. 소국 연맹체제 그러니까 일종의 연방제나 국가연합체였다는 증거는, 그때까지도 지방 소국들이 독자적인 군대를 갖고 중앙의 병권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앙 정부가 약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체질이 약했기 때문에, 신라는 주변 나라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랬던 나라가 6세기 중반부터 가야를 흡수하고 몸집을 불려 나가더니 7세기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고구려까지 멸망시켰다. 신라가 이렇게 갑자기 강해진 데에는 6세기 초반부터 진행된 일련의 체질개선 작업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보다 1세기 전인 5세기에 들어, 신라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외부적 시련에 직면했다. 그 전까지 한민족 최강인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북중국 진출을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상호 항쟁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다. 그런데 5세기 들어 북중국 최강인 북위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자, 장수태왕(태왕이 정식 명칭)은 북중국보다는 한반도 쪽으로 창칼을 돌렸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한반도로 창칼을 돌리면서 한반도 정세는 한층 더 긴박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백제는 신라를 한층 더 압박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여기에다가 동쪽 왜국은 신라한테 항상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신라의 존립이 한층 더 힘들어져 갔다.
그로 인해 위기가 가중되던 6세기 전반기에 등장한 신라왕들이 그 유명한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이다. 당시의 신라왕들은 외부의 위기가 내부의 도전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절박하게 인식했다. 신라처럼 체력이 약한 나라가 외부 추위에 장기간 노출되면, 내부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일반 백성들이 문제제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면 왕조가 존망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인식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왕들이 내린 판단은 나라의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체질 개선을 통해 내부의 도전을 예방하고 외부의 추위에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체질 개선 방식 중 하나는 512년(지증왕 13년차)의 우산국(울릉도) 침공처럼 성공 가능성 높은 군사행동을 통해 중앙의 군사력을 강화시켜 가면서 지방의 병권을 빼앗고 이를 중앙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법흥왕 집권 4년차인 517년에 있었다. 군사권을 통일함으로써 신라는 소국연합체제를 극복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군사권을 중앙으로 통합한 뒤에는 종교개혁이 있었다. 일단 칼을 쥔 뒤에 백성들의 의식을 개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벌어진 일이 불교 국교화다. 종교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고대 국가에서, 국교를 바꾸는 것은 국가를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일이 군사권 통합 뒤에 벌어졌다.
그 이전에 신라인들은 단군 이래의 신선교를 신봉했다. 이것은 선녀와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주로 산속에서 수행하는 종교였다. 샤머니즘과 도교가 복합된 이 종교를 중심으로 신라 사회의 지배체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6세기의 신라 정권은, 인도에서 출현하여 중국을 통해 유입된 국제적인 외래 종교를 국교로 인정했다. 이때가 법흥왕 때인 527년이다.
해외에서 들어온 불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함으로써, 신라인들은 새로운 정신세계로 무장하고 세계정세에 대응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신선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기득권 체제를 공격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등장시킬 수 있는 토양을 갖추게 되었다. 지배층 개편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전국적 차원의 권력 개편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등장한 게 바로 화랑도다. 화랑은 귀족의 자제들 중에서 사회를 이끌 만한 청년들로 구성됐다. 전국적 차원의 지배층 개편이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화랑들이 등장했으니, 이들은 구체제 귀족들의 자제이기보다는 신체제 귀족들의 자제들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