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내외분과 외가 감나무 아래서(1971. 7.)
박도
외삼촌은 우리 집안이 몰락해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학비 조달이 어렵자 졸업할 때까지 줄곧 등록금을 대주셨다. 그뿐 아니라 내가 등록금을 얻으러 외가에 갈 때마다 이런저런 세상사를 들려주시고 한시를 가르쳐 주셨다.
외가를 거쳐 부모님이 사시는 부산으로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교사가 됐다는 얘기에 그날 밤 늦도록 비로소 당신이 지난날 교단에 섰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의 교단 이야기 아버지는 해방 전 해인 1944년 일본에서 중학교 재학 중에 여름방학을 틈타 귀국하셨다. 그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로, 할아버지는 외아들이 학병으로 끌려갈까 염려한 나머지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한다고 귀국 일주일 만에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그런 뒤 구미의 우리 옛 집이 바로 선산 경찰서 코앞이기에(선산경찰서는 구미에 있었음) 몰래 아들을 선산군 도개면 당신 누님 집에서 피신시켰다.
아버지는 그런 은둔생활 중, 도개소학교 교장 애토우유지(江藤勇二)의 가정방문으로 발각됐다. 그 사실이 지서로 통보되자 지서장 야마모도(山原)가 전시에 젊은이가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도개소학교 교사로 권유해 교단에 서게 됐다.
일제강점기 말, 식민지 백성들의 가난한 아들과 딸들, 고향 후배들을 가르치시면서 일본말만 해야 했던 그 시절 아버지는 틈틈이 아이들을 낙동강가로 데리고 가서 머리의 쇠똥을 벗겨주며 조선말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참사랑으로 감쌌다.
이듬해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사와 친일 조선인 교사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는데 아버지만 학교를 지켰다. 그해 8월 19일 해방 경축 도개 면민대회가 도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그 행사가 끝나자 제자들이 몰려와서 아버지를 기마전 때 기수처럼 태워 운동장을 서너 바퀴 돌면서 '박기홍 만세!'를 연호 하였다고 했다.
"참 아이들은 영특하단다. 아이들 마음은 천심이다. 어린 제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걔들은 누가 친일 교사인지 저희들이 먼저 알고 있더구나. 그때 그 감격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