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재다능했던 임종국 선생은 한 방송국 주최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 출전해 2등에 입상할 정도로 기타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민족문제연구소
- 오빠가 다재다능했다고 들었습니다. "청년 시절의 오빠는 예술에 심취했어요. 예술가 기질도 뛰어났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음악가 혹은 문학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아코디언과 첼로와 기타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었어요. 오빠는 브람스와 쇼팽, 랄로(프랑스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과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2악장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격정적인 곡보다 마음이 잔잔해지는 곡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불같은 성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어요."
-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서울대의 이어령, 고려대의 임종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오빠의 머리가 우수했다는데. "오빠는 뛰어난 수재였어요. 둘째 오빠(임종철,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셋째 오빠(임종한, 서울대 철학과 졸업)도 공부를 잘했지만 오빠를 따라가진 못했어요. 오빠의 재혼 결혼식 주례였던 조용만(전 고려대 교수) 선생님의 말씀이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에 합격한) 종철이 머리가 좋긴 하지만 종국이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수재였어요. 두 오빠는 큰오빠가 대충 공부하는 것 같은데 시험을 보거나 글을 쓰면 엄청난 결과를 만드니까 기가 죽는다고 말했었어요.
그런 오빠가 불행한 시대를 만나면서 시련을 많이 겪었어요. 가난 때문에 대학을 휴학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고아원에서 방을 얻어 지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하다 대학을 저하고 같이 졸업했어요(1952년 고려대에 입학했지만 장기 휴학했다가 1969년 21회 졸업생이 됨). 오빠가 친일파 연구를 하지 않고 그 좋은 머리대로 살았으면 부와 명예를 누렸을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체질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선생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습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18세에 서울음악전문학원 첼로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한 방송국 주최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 출전해 2등에 입상하는 등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판검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1956년 27세에 시인 <이상전집>(3권)을 발간하면서 문단과 학계에 주목을 받으며 문학평론가가 되고, 1959년 <문화예술>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문학가가 될 수 있었지만 그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친일파들의 추악한 행적을 발견하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친 것입니다."
- 오빠의 성품이 불같은 편인가요."어떤 사람들은 오빠 성격이 까다롭다고 말하는데 저에게 오빠는 편한 사람이었어요. 오빠는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할 줄 모르지만 인간의 아픔에 대해서는 감싸주는 분이었어요. 10점짜리면 10점 그대로를 내놓으면 봐주었지만 거짓말하면 혼냈어요. 오빠는 무지한 것과 노력하지 않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는데 '공부도 안하고, 책을 안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개돼지 같은 사람이 된다!'고 수없이 강조하면서 저와 올케에게 책을 읽고, 공부하고, 생각하며 살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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