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 203고지 이령산 전몰자 위령탑 앞에서 기자(2009. 11.)
박도
2009년 10월, 나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으로, 안 의사 마지막 행적 156일을 연추마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뤼순까지 그대로 추적했다. 그때 마지막 답사지는 바로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 일대였다.
나는 당시 안중근기념관 김호일 관장의 소개로 다롄대학교 유병호 교수를 만났다. 그분에게 현지 가이드를 부탁하자 다롄안중근연구회 박용근 회장을 추천했다.
나는 그의 안내로 이틀 동안 다롄 시내 일대와 뤼순 일본관동법원, 일아감옥(日俄監獄) 등을 잘 둘러봤다. 마침 시간이 남기에 러일전쟁 최대격전지인 이령산 203고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그러자 박씨는 이령산 중턱 택시정류장에 이른 뒤 기사 핑계를 대면서 거기서 지형 설명으로 끝내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박씨에게 택시기사에게는 별도 대기료를 더 주겠으며, 당신도 거기서 잠깐 쉬라고 했다.
그런 뒤 나는 그곳 안내판을 보면서 혼자 203고지로 올라갔다. 203고지 정상에 오르자 일본군 전몰자 위령탑과 러시아군 포진지, 일본군 280미리 유탄포 전시장, 203고지 진열관 등, 볼거리가 엄청 많았다. 한참 그곳 전적지를 촬영을 하는데 박씨가 헐떡이며 뒤따라 올라왔다.
"어르신 산삼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그런 것을 먹은 적 없습니다. 난 육군 보병 출신이요.""아, 네에."
그밖에 지린성 청산리전적지나 국내 호남의병지 답사 때도 그런 일이 더러 있었다. 독립군 전적지나 의병 창의지역은 대부분 산골 궁벽한 곳이요, 100~200년 이전의 일이라 정확한 현장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전적지를 대충 지나치지 않았고, 내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현장을 찾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았다.
그러한 내 체력은 고교시절 신문배달로, 그리고 육군보병학교 시절의 훈련, 현역 보병소총소대장 시절에 산야를 누볐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란 지나고 보니까 좋은 것만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악전고투한 지난 인생이었기에 앞날을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이나마 건강하게 살아온 듯하다. 그야말로 크고 길게 보면,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게' 인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세상은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에서 보면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동방의 귀인나는 학훈단(현, 학군단)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대학 1, 2학년 때 줄곧 병역연기원을 내야 했다. 2학년 때인 1966학년도 1학기 초 병역연기원을 내고자 학생처에 갔다. 하지만 1차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1차 등록 마감 날까지 등록금을 백방으로 구했으나 허사였다.
나는 다시 학생처에 가서 꼭 2차에 등록을 할 테니 병역 연기원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담당 직원은 구비서류에 등록금 납부 확인필이 꼭 있어야 하기에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잘랐다.
나는 낙담을 하고 대학 본관 앞을 지나는데 그날은 1차 등록마감일로, 많은 학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본관 회계과 창구 앞에서부터 본관 앞 미루나무 그늘까지 100미터 이상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 줄에 서 있는 고교동창 윤기호가 눈에 띄었다. 그는 고교시절 밴드부원으로 커다란 호른을 불었던 친구였다. 그와나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그때 내가 무척 절박한 탓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염치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기호야, 네 등록금 나한테 양보해주라. 나 학훈단 입단하려고, 병역 연기원 때문에 그래. 내 2차 등록 전까지는 꼭 갚을게." "그래?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자기 손에 쥐고 있던 돈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아예 자기 자리까지 양보해줬다. 솔직히 그런 온정은 서로 처지를 바꿔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 친구 덕분으로 그날 등록한 뒤, 즉시 학생처에 병역연기원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듬해 학훈단에 지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