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 트레킹
김동우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침낭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모두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산장 안에 머물고 있는 트레커들 모두 말이 없었다. 밤 11시. 따뜻한 침낭에서 몸을 빼냈다. 따뜻한 차와 쿠키로 요기를 한 뒤 미리 두통약 한 알을 삼켰다. 결전의 순간이었다. 어느 트레킹보다 각오는 비장했으나 등정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밤 12시 15분 가이드와 숙소를 나섰다. 가진 옷을 모두 껴입었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발 4703m의 한기는 차디찼다. 정상 공략은 공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우회로는 없다. 키보 산장 뒤편으로 솟은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야 한다. 미리 출발한 트레커들의 헤드 랜턴이 저 멀리 경사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1192m를 올라야 했다. 해발 0m에서 출발하는 산행이라면 이런 긴장감은 필요가 없다. 다행히 키보 산장에 머물 동안 고산증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 두통이 찾아올지 몰랐다.
"뽈레뽈레."출발은 순조로웠다. 어둠 속에선 대화도, 야경도 없었다. 천천히 땅을 보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다였다. 한 시간 뒤 밑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헤드 랜턴 불빛이 길게 줄지어 조
금씩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저길 올라온 거구나. 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정도 더 오르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흠~~~슈으웃~ 흠~~~슈으웃~'해발고도가 5000m를 넘자 약간만 호흡이 엉켜도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날숨과 들숨이 아니었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갈수록 호흡은 엉망이 됐다. 그리고는 두통이 찾아왔다. 키보 산장을 출발한 지 3시간 만이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가파른 경사를 30분 정도 더 올랐을 때였다.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속이 울렁이는 게 토할 것 같았다. 가이드는 내게 심호흡을 크게 하라고 했다. 다행히도 위장 속 음식물들이 솟구치려던 자세를 고쳐 잡으며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두통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두통약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느껴졌다. 작은 약통을 꺼내 파란색 알약을 삼켰다. 고산증에 효과가 있다는 '비아그라'였다. 비아그라를 복용하고 나자 두통의 강도가 조금은 약해졌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끝도 안 보이는 검은 실루엣을 쫓아 한 시간쯤 더 산을 오르자 다시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누군가 날카로운 연필심으로 머릿속에 '포기'란 단어를 쉼 없이 써대고 있는 것 같았다. 5분도 못 가 다시 멈춰 섰다. 한 발을 떼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날 집어삼킬 것 같은 검은 실루엣이 조금씩 끝자락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도니스는 조금만 가면 끝이 난다고 했다. 그가 이야기한 조금이 결코 조금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힘이 생겼다.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좀비처럼 천천히 오른 경사의 끝에는 길만스포인트(5681m)가 기다리고 있었다. 능선의 시작이었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런데 가이드는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1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뭐!"정상까지의 고도차는 214m였다. 도대체 능선이 얼마나 길다는 이야기인가. 사실 능선이 긴 게 아니라 고산증 탓에 속도를 낼 수 없는 게 문제였다.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머릿속에 들어간 갈고리가 작동을 시작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짓을 하는지 다 포기하고 싶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는 깨져나갈 것 같았다. 이때 내 옆으로 가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중환자처럼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이 지긋한 서양인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잡념이 사라졌다.
오르락내리락 능선을 따라 1시간 남짓. 뇌는 쪼그라드는 듯했고, 얼음장 같은 바람은 더욱 매섭고 맹렬하게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극심한 추위였다.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눈꺼풀도 중력의 힘을 못 이기고 점점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저 멀리 '우후르피크(킬리만자로는 1889년 10월 5일 독일 지리학자인 한스 메이어,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루드비히 푸르첼러 그리고 지역 가이드 요나스 로우에게 처음 정상을 허락했다. 이후 킬리만자로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독일 황제의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1961년 탄자니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 킬리만자로 정상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스와힐리어로 우후르(Uhuru)는 자유를 뜻한다)'가 눈에 들어왔다. 키보 산장을 출발한 지 6시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