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페티 앞은 만남의 장소이자 동네의 작은 사교장이다.
신희완
다른 독일 도시에도 트링크할레(Trinkhalle), 부데(Bude), 키오스크(Kiosk) 등 지역별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슈페티와 유사한 편의점이 있다. 이 상점들은 19세기 산업화 시기 당시 도시로 몰려들던 노동자들이 식수와 음료를 손쉽게 구입했던 상점으로부터 유래했다.
후에 술, 담배, 신문, 잡지 등이 판매 품목에 추가되며, 현재 베를린의 슈페티처럼 각 도시의 거리를 밤새 밝히는 점포가 되었다. 하지만 베를린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많이 줄어든 상태고, 최근 더 다양한 품목을 갖춘 주유소, 편의점 등과 경쟁 중에 있다.
편의점이 새롭게 생겨난 산업화 시기의 변화와 더불어 베를린에서는 좀 더 특별한 사연이 더해졌다. 동·서독의 분단 시절, 동 베를린의 교대제 근무 야간 노동자들이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식수 등의 음료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필수품과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판매점이 생겨난 것이다.
통일 이후 서 베를린에서는 이 판매점을 모델로 슈페티를 만들게 된다. 참고로 슈페티는 이러한 판매점의 정식 명칭(Spätverkaufsstelle)의 줄임말이자 즐겨 부르는 애칭이다.
그렇지만 슈페티를 단순한 편의점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현재 베를린에만 약 1000개의 슈페티가 있을 만큼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각 동네에서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떼놓을 수 없는 특별한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 슈페티를 문화재로 지정하자며,
슈페티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한 책이 따로 발간되었을 정도다.
여전히 이주 배경을 지닌 이들이 쉽게 주류 사회로 편입하기 어려운 독일 사회에서 슈페티나 꽃집 같이 근로 조건이 열악한 직업군은 보통 터키 혹은 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이주민 가정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슈페티는 한 동네와 거리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잠시 돈을 벌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지역사회에 자리 잡아왔고, 앞으로도 대를 이어서 가게를 운영할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신뢰가 쌓이면, 집 열쇠 등을 가게에 잠시 맡겨놓을 수 있는 이웃이 되기도 한다.
동네마다 자리 잡은 슈페티는 지역 사회의 작은 중심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슈페티 앞을 만남의 장소로 생각하기도 한다. 주변의 카페, 음식점과는 다르게 큰 부담 없이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슈페티에서 맥주를 사서 점포 앞 인도나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새로운 이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최근 유로 2016이 시작하며, 슈페티 앞은 작은 축구 응원석이 되기도 하였다. 도시의 가치는 이렇게 다양한 기능과 사람들이 작은 규모로 함께 섞이고 부딪힐 때 더욱 빛이 나고, 베를린의 슈페티는 그것을 잘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