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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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의 이름은 또 다른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1936년 소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그는 동아일보 학예부 미술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체육부 이길용 기자 및 후배 화가 정현용과 함께 공모하여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가슴에 찍힌 일장기를 지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2층 편집실에서 사환 아이가 한 장의 사진을 들고 왔다. 이어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구내전화로 나를 불렀다. 사진의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좋다고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 붓을 들어 일장기 위에 흰 물감을 칠했다. 그런 다음 종이에 싸서 동판부에 보냈다… 그날 저녁 술을 먹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집사람이 '사환 아이가 오는 대로 신문사에 들리라고 했다'고 전했다… 편집국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들의 얼굴이 새하얗다. 경찰들이 신문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경기도 경찰부로 연행됐다." - 청전 이상범 홈페이지결국 이 일로 그는 40일간 구속되었고, '언론기관에 관여치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렇게 그는 동아일보를 떠났다.
여기서 그의 삶을 더듬어 보자. 그는 충남 공주 벽촌의 빈농 출신이었다. 열 살인 1906년 보통학교를 겨우 마쳤으나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이라 그가 찾은 곳은 학비가 없는 경성서화미술회 강습소였다. 여기서 안중식에게 전통 화법을 익혔다.
하지만 서화미술회는 1919년 안중식이 3.1운동에 연루되어 옥고 후유증을 세상을 떠나자 운영이 어려워졌다. 이후 이상범은 우리의 근대적 민족미술을 세우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청년 이상범이 이렇게 민족의식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신 배경과 3.1운동으로 숨진 스승 안중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랬던 청년 이상범도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을 통해 노골화되는 군국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이제 '예술도 군수품'이라는 전시문화정책에 동조하며 일제 문화정책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앞서 살펴 본 노천명이 글로써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다면 이상범은 그림으로써 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가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만큼 컸기 때문에 지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그의 이름과 친일행위 내용이 등재되었다.
한 인간의 행위가 모두 완벽하고 정의로울 수만은 없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그릇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지나친 듯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좌우익을 모두 아우르는 미술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일제강점기 이상범처럼 총독부 기관지던 <매일신보>에서 기획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의 시화에 함께 그림으로 총독부에 화답했던 고희동, 노수현 조차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상범을 비롯한 김은호,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배운성, 송정훈 등 친일활동 이력이 뚜렷한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최고의 거장이란 평가를 받았음에도 살아생전 개인전 한 번 갖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단신의 작은 체구에 겸손하고 소탈하며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성이 깃든 인품이라고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얘기된다.
그리고 술을 즐긴 애주가에 재기 넘치는 재담가로 유명하고, 주변과 무리없는 친화력이 커다란 장점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에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대표적인 한국의 소시민'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친일활동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그의 예술적 성과, 수묵화의 거장으로만 기억될 뿐. 물론 이상범 생전에 자신의 양심고백도 없었다. 거장의 이런 행동은 우리 미술계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순수미술은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친일옹호론자들의 말처럼 지금 우리 시대의 예술 세계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