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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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의 활동 상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도 이때 발표되었다. 그 뒤 1938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고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그러다 1943년에는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승전하는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는 거센 친일파 척결 분위기에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했다.
곧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미쳐 피난 가지 못한 노천명은 이때 월북 작가인 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노천명은 좌익분자 혐의로 자그마치 2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여러 문인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약 6개월간 투옥한 뒤 1951년 4월 석방됐다.
그 후 노천명은 공보실 중앙 방송국에서 일하고, 3차 시집을 발표했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1957년 6월 16일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졌고, 46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노천명은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는 한없이 순수한 시적 낭만에 잠긴 소녀처럼 상상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만할 정도의 도도함과 결벽증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성품으로 인하여 동료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못해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었다고 그는 <자화상>에서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런 도도함조차 권력 앞에서는 한낱 갈대에 불과했나 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권력에 굴복했고, 또 전쟁 당시 인민군과 유엔군의 권력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굴종한 노천명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에게 도도함이란 기회주의와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일본 패전 후 삭제해버린 친일시, 그는 구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