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미국외교관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Willard Dickerman Straight)가 찍은 사진으로 해치의 본래 위치를 알 수 있다.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
전차 개통과 더불어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해치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현재 광화문 양 옆에는 두 개의 해치상이 놓여져 있다. 이것은 본래 지금의 위치보다 훨씬 앞인 사헌부가 있던 곳(현 세종문화회관 북쪽 세종로공원)에 있었다.
해치가 불을 먹어 치운다는 전설로 인하여 풍수지리상 화산(火山)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대원군이 경복궁 중창 때 왕권강화를 위한 상징성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왕이 성군임을 칭송하는 의미와 함께 궁궐에 들어올 때 마음을 가다듬고 공손한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곳부터 경복궁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궁궐에 오는 사람은 이 해치상이 놓은 곳에서 안쪽으로는말이니 가마 등 탈것에서 내려서 마음을 가다듬고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1890년대 사진에는 해치 앞에 돌이 있었던 것은 이곳부터 탈것에서 내리라는 하마(下馬)표시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 고대부터 내려오는 상상의 동물로 본래 뿔이 하나고 성품이 충직한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서로 따지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정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는 '사헌부' 대문앞에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사헌부 관헌들은 치관(豸冠)이라 하여 해치가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대사헌의 관복 흉배에 해치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반면 동급의 다른 관헌들은 학을 수놓았다.
이런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국회의사당, 대검찰청, 사법연수원 등에도 해치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국회 해치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국회 것은 1975년의사당 준공 무렵 해태제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당사가 약 3천만 원을 들여 조각하여 기증했는데 이때 ㈜해태주조에서 생산하는 '노블와인'이라는 상표의 백포도주를 바로 그 해치상 아래 각각 36병씩 총 72병을 묻었다고 전한다.
참고로 눈이 나쁜 사람을 우리는 '해태 눈깔'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이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궁궐 앞에 서 있으면서도 탐관오리가 들끓는 현실을 비꼬는 의미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사법체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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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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