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아래 울타리처럼 둘러 있는 가시나무에 축구공이 펑크가 났다.
송성영
공이 펑크가 났는데도 아무도 심통을 부리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다들 낄낄거리며 내 곁으로 몰려와 앉았다. 음료수를 사러간 녀석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먼 곳에 마켓이 있다. 공연히 음료수를 사준다고 했나 싶다. 심부름 떠난 녀석들에게 괜히 미안했다. 이곳 목초지 축구장에서 마켓까지 가고 오는 거리가 최소한 삼사십 분 거리다. 음료수를 사러 간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내게 힌디어를 알려줬다.
"샤바스!""왓 이즈 민 샤바스?""샤바스 이즈 나이스, 버리아 이즈 베리 나이스." 힌디어로 '샤바스'는 '잘 한다', '좋다'라는 뜻이고 '버리아'는 '아주 좋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뻐센드 이즈 라이크. 위 베리 뻐센드 유.""미 투."좋아 한다는 힌디어로 '뻐센드'. 녀석들이 힌디어로 나를 아주 좋아한다며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는지를 물어본다. "좋다" "아주 좋다" 좋아 죽겠다"라는 우리말을 따라하다가 이번에는 가족 사항까지 물어본다.
"자녀가 있습니까?""아들이 둘 있다. 아들을 힌디어로 뭐라 하냐?" "베따, 베타!""아, 베따! 유 가이즈 아 마이 베따!""노, 노, 프렌드!""오케이, 마이 프렌드!""유 가이즈 아 마이 굿 프렌드!"힌디어로 아들을 '베따'라고 한다. 하여 녀석들에게 너희들은 내 아들이니, 나를 아버지라 부르라 했더니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녀석들이 "마이 프렌드, 프렌드" 해가며 새삼스럽게 악수를 청하며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친구'라는 힌디어를 알려준다.
"프랜드 이즈 도스터"'도스터', 친구라는 힌디어를 배워가며 나는 녀석들과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되는데 국적과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친구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녀석들은 단순히 언어를 통한 친구가 아니었다. 닷새 동안 나이와 언어를 뛰어 넘어 서로 가슴을 열어 눈을 맞춰가며 사귄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10여 년 전, 시골집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 집 아이들 친구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무서운 얘기를 해달라는 아이들 성화로 '이야기 만들기' 놀이를 했다. 천하무적의 괴물 고양이가 흉가 집에 보물을 숨겨놓고 있는데, 그 보물을 어떻게 가져 올 것인가라는 이야기 놀이였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며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단지 이야기를 설정했을 뿐이었다. 아이들 각자가 풀어나가야 했다.
아이들은 천하무적의 고양이에게서 보물을 가져오기 위해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꺼내 놓았다. 보물을 빼앗기 위해 작대기에서부터 칼과 총, 핵무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시무시한 무기가 등장했고 맛있는 고기며 생선, 진수성찬의 요리와 엄청난 돈으로 유혹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 어떤 무력이나 유혹은 천하무적 고양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무런 말도 없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한 아이가 말했다.
"고양이와 친구가 되면 되잖아." 서로가 사심없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되면 고양이의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맞장구쳤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친구가 되는 것이고 또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바로 친구라며 결말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