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대기업 연구소에는 같은 직급이라도 입사 학력에 따라 연봉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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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연구소로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학벌 좋은 연구원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조금씩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갔다. 연구소에 근무하던 400명 가량의 연구원들 중에서도 학벌에 따라 회사에서 받는 처우가 달랐다. 같은 직급이라 할지라도 입사 학력에 따라 연봉 차이가 났다.
우리 회사를 관리하던 기획부서에는 과장급 선임 연구원이 있었다. 그 연구원은 '전문대'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문대에서는 꽤나 똑똑한 인재였고 교수님 추천으로 이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수십년간 이 회사에 충성을 다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 선임 연구원보다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훨씬 더 경력이 짧은 후배 사원들이 금세 선임 연구원이 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학력이 높은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직급의 선임 연구원이 되는 것을 보는 것도 모자라 그들보다 더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낮은 연봉을 받아야 했다. 학력에 따른 초봉의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연봉 인상률에 더해져 그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었다.
전문대졸이든 대졸이든 석사든 박사든 우리의 눈에는 모두가 다 같은 대기업 연구원들이었지만 그 조직 안에서는 그렇게 잔인한 경쟁이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우리 사장님은 그런 대기업의 시스템과 현실에 대해 잘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며 '공부'를 강조하셨다.
우리 사장님은 이 대기업의 '개발 실장' 출신이다. 현역시절 연구소의 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그룹장' 시절에 새로 입사하던 신입 연구원들이 지금은 이 연구소 핵심 부서를 책임지는 그룹장이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는 '을'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사장님의 그늘 밑에서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력 차별 이외에도 연구소 조직에는 아주 살벌한 '정치'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 정치는 여러 부류의 '줄타기'를 통해 진행됐는데 특히 전자공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물리를 전공한 사람들의 신경전이 살벌했다. 그룹장의 전공에 따라 그 부서 연구원들은 기를 펴고 지내기도 했고 주눅이 들어 지내기도 했다.
제품 개발 단계에서 제품에 어떤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담당자들은 위에서 욕을 덜 먹기 위해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에서 발생된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여기서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그룹장인데 그룹장의 전공에 따라 패널 담당의 말이 잘 먹힐 수도 있고 회로 담당의 말이 잘 먹힐 수도 있다.
그룹장도 사람인지라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설명할 때 알아듣기가 쉽고 잘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공이 다른 그룹장을 모시는 연구원들은 그 '보이지 않는 벽'을 넘지 못하고 아주 힘들게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공도 전공이지만 가장 큰 '라인'은 바로 '출신 학교'다.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많은 연구원들 중에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회사에서 연구원을 채용할 때에도 해당 학교 출신들을 많이 뽑기 때문에 그 줄은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내가 그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사람 채용하는 걸 옆에서 보게 된 적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대기업이다 보니 수천 장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들이 도착했다. 구직을 하는 사람들은 그 한 장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밤을 지새워가며 고민했을 테지만 막상 기업에서는 그 많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읽어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추려진 서류들을 가지고 원하는 스펙을 가진 재원을 찾기 시작한다. 거기서 최종으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서류전형 합격 통보를 하고 그룹장들이 면접을 진행했다. 채용 전형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다보니 그 연구소 안에는 같은 학교 출신들이 계속해서 들어왔고 이른바 '라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는 그런 치열한 경쟁과는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사장님은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그런 현실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 우리가 여기를 떠나 다른 곳에 갔을 때까지도 사장님이 데리고 있던 직원이라면 그 '출신'답게 똑똑한 재원이 되길 바라시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회사를 다닌 시간은 '직장'이 아닌 '학교'를 다녔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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