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실 '새들생명울배움터' 대표의 강의는 글쓰기의 압박감에 움츠러든 나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사진 제공 강한종)
강한종
최 대표는 소통이 공포와도 같았던 경험이 있느냐고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선한 의도로 말한 것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상황이나, '아'라고 하는데 상대는 '가'라고 알아들으면 어떻게 소통을 할 수 있느냐고 했다.
물론이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공포와 같은 경험이 있다마다. 최 대표는 다른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길 바란다면 소통의 공포 속에 멍하니 멈춰 있을 수는 없다고 서두를 뗐다. 진심이 거부되는 소통이 단절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이를 고민하며 최 대표는 '변화와 전진의 공적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참석자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공'과 '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봉실 대표가 말하는 '공적 글쓰기'는 무엇일까. 그는 '공적'과 '글쓰기'를 나눠서 설명했다. 먼저 '공적'이란 말에 대해 살펴보자. '공적'이란 말은 '국가나 사회에 두루 관계된다'는 뜻이다. 공동체와 타인을 고려한다는 말이다.
자기 방과 같이 홀로 있는 공간을 보통 우리는 사적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건드릴 수 없는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여긴다. 허나 이 독립적인 영역은 완전히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최 대표는 사적인 삶은 공적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등교한 학생의 얼굴색을 살피면 어젯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일찍 잠들었는지, 밤늦게까지 게임을 했는지, 남모를 고민에 잠 못 이루었는지 세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드러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딱 잘라 나누어져 있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긴장감을 느끼고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두 영역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적인 시공간이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최 대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의 '신독잠(愼獨箴)'의 내용을 소개했다.
"그윽한 밤 말 없는 그 공간에 듣고 보는 이 없어도 귀신은 그대를 살피노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사심을 품지 말지어다처음 단속 잘못 하면 하늘까지 큰물 넘치리라위로는 하늘을 이고 아래로는 땅을 밟는 몸날 모른다 말한 텐가 그 누구를 기만하랴사람과 짐승의 갈림길이고 행복과 불행의 분기점이라어두운 저 구석을 내 스승으로 삼으리라."옛 문인은 '그윽한 밤, 말 없는 그 공간'을 사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홀로 있는 시간인 어두운 구석을 스승으로 삼아 게으름이나 사욕을 피우지 말고 사심을 내쫓으라 했다. 홀로 있을 때 자신을 삼가는 '신독(愼獨)'의 삶을 사는 것을 성인의 길이라 생각했고, 지식을 가진 자의 마땅한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최 대표는 홀로 있는 시간에 자신을 삼가지 않으면 공적 영역에서 문제가 드러난다고 했다.
최 대표는 '공적 영역'은 '신독'의 삶을 살아내려는 공동체적 가치관과, 홀로 있는 영역을 자신의 소유로만 고집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두 가치관의 충돌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장이라고 했다.
"'이건 내 거야, 내 시간이야, 내 물건이야, 너와 상관없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혼자 있는 것 같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적 영역을 고수하려는 가치관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적 영역을 공적인 책임감으로 살아내려는 가치관이 대립합니다. 공적인 영역은 이런 두 가치관의 충돌이 만연한 곳입니다."공적 글쓰기,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최 대표는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공동체적인 가치관이 충돌하면 소통의 단절이 일어난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다. 홀로 있으려 하는 사람보다 함께 있으려 하는 사람은 소통의 단절로 인한 고통을 격하게 느낀다. 짝사랑하는 이가 애가 타는 것처럼 말이다. 공동체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단절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통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단절을 연결하기 위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최 대표도 소통이 어려워 단절을 선택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럴 수 없었다. 소통이 단절된 현실이 자신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약해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품에 안고 있는 생명 때문이라도 소통의 단절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했다. 굳게 마음을 먹었다. 거듭해서 소통을 꾀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소통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돌이키게 했다.
최 대표는 '글쓰기'는 이런 가치관의 충돌이 만연한 '공적 장'에 소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소통의 대상은 평소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서로 가치관이 다를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다. 그래서 '공적 글쓰기'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너무 달라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을 향해 소통을 작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를 만나려고 의지를 내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맞닥뜨린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내 뒤에 올 다음 세대에까지 악순환은 이어진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소통이 막힌 현실을 살아가게 할 수 없으며 그들도 소통으로부터 달아나게 할 수는 없다. 소통하기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내던지고 다시 다른 존재를 만나기 위한 글쓰기를 시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소통이 단절된 시대, 왜곡된 공적 글쓰기최봉실 대표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로서의 공적 글쓰기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짚었다.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최 대표는 공적 글쓰기가 왜곡되는 세 가지 요인을 들었다.
첫째는 '토설'의 왜곡이다. 이전 시간 옥명호 <복음과상황> 편집장의 강의(관련 기사 :
'응어리를 풀어내는 '결'쓰기')에서도 '토설'이 언급되었다. 옥 편집장이 말한 '토설'은 내면의 가시를 토해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 자신을 정화하여 타자와의 소통이 원만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설'에서 정화가 빠지면 소통은 왜곡된다. 최 대표는 이를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토설'은 자칫하면 소통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내면을 토로하는 건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공적 글쓰기에서 그것만으로 일관하고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 자기를 뛰어넘어 다른 이들을 만나야 하는데 자기에게만 매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둘째로 공적 글쓰기를 왜곡하는 것은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은 '공명심'이다. 최 대표는 공적 글쓰기를 하려면 '공명심'에 대해 반드시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SNS의 공감 수와 조회 수가 올라가면 교만해지고 거들먹거리는 경우가 있다. 공적 글쓰기는 명예욕의 유혹을 받기 쉽다. 이에 대한 자기 경계가 분명히 필요하다. 공적 글쓰기는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사랑의 행위인데 자신의 명성을 날리기 위해 공공을 이용하는 것은 간음하는 행위와 같다고 최 대표는 지적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을 상대화하고 도구화하는 행위로써 공적 글쓰기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소통을 가로막는 글쓰기다. <조선일보> 한현우 주말뉴스부장이 쓴
'간장 두 종지' 같은 글이 그 좋은 예다. 이 기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자가 중국집과 고객 사이를 대놓고 갈라놓겠다고 작정하고 쓴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이슬람권 사람들을 모두 IS처럼 위험한 존재로 부추기는 글도 마찬가지다. 포털 사이트를 채우는 연예 가십 기사 역시 공적인 글이지만 존재와 존재가 만나도록 이끄는 글이 아니다. 연예인을 우리의 눈을 만족하게 하는 도구로만 다룬다. 좋아하는 대상을 존중하여 대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청소년들은 만남의 대상을 도구화시키는 만남에 물들게 된다. 최 대표는 "실컷 공부해서 이런 글들을 쓰려고 기자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