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직장을 나오고 월급은 끊겼지만 매달 나가는 지출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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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2일 갑상샘암 수술을 받은 날이다. 그 힘들었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벌써 2년여가 흘렀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바로 내 '명함'이라고 할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는 아주 미미하다. 단지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그러다보니 힘들고 지쳐도 그 명함을 잃지 않기 위해 나와 가족을 등한시 하며 살아 왔다. '갑상샘암'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찾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난날의 그 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일 모레면 여든을 바라 보는 나이다. 평생을 고생만 하고 살아온 어머니. 자식이 힘들게 버는 돈, 병원비로 쓰는 것마저 아까워서 아파도 제대로 된 검사 한번 받지 않고 진통제로 버텨가면서 하루 하루 살고 계셨다.
직장에 다닐 때는 한 집에 살아도 어머니와 얼굴 마주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들어오면 어머니는 이미 주무시고 계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몸이 힘들다보니 어머니가 어디 아픈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살았다. 기침을 하거나 어디가 불편한 모습이 보이면 '제발 참지 말고 병원가라'며 짜증을 내기만 했었다.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건강에도 신경을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 어디가 불편한지, 병원은 제대로 다니시는 건지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병원을 예약하고 모시고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포기하고 살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해 대학병원까지 모시고 갔고 고질병들은 하나씩 좋아지고 있다.
갑상샘암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직장을 쉬게 되었다. 모처럼만에 여유를 가지고 인생을 살다보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꿈과 나의 가족들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직장에 복직을 하고 1년 만에 나는 독립 선언을 했다.
대기업 사원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사업가 지망생'으로 신분을 바꾸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시면서 반대하셨다. 하지만 내가 죽을 고비를 넘겨오는 것을 옆에서 봐온 어머니기 때문에 '이제는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끝까지 말리진 못하셨다.
지난 3월 8일. 3108일간을 근무해온 직장에서 나왔다. 매달 꼬박 꼬박 나오던 월급은 없어졌지만 매달 나가야 하는 지출은 그대로였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살겠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하기에 마냥 천천히 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독립을 하고 몇 달간 내 한 달 수입은 월급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2010년 급한 돈이 필요해 퇴직금 마저 중간정산을 받았다. 그리고 5년이 채 안 되는 근무기간 동안의 퇴직금을 받았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회사를 나오고 보니 그 퇴직금 중간정산이 후회가 됐다. 그래도 이 돈이 내가 홀로서기 할 동안의 시간을 벌어줄 돈이기에 아주 소중했다.
직장을 나오는 시점에 얼마 안 되지만 적금도 하나 만기가 되었다. 그 적금과 퇴직금을 몽땅 찾아 CMA 통장에 넣어두고 매달 모자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 통장 잔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보고 있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돈이 떨어지면 시간을 쪼개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할 생각으로 홀로서기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시장이 아주 크진 않지만 투자 시간대비 효율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업무를 볼수 있다보니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충분히 업무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았다.
마음을 편히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이기 때문일까? 독립생활 8개월째 드디어 월 수입이 직장 다닐 때의 월급을 훌쩍 뛰어 넘었다. 물론 이 수입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한다. 들쑥 날쑥 다시 수입이 줄어들 순 있겠지만 콘텐츠 사업이라는 게 데이터가 축적될 수록 매출이 발생될 가능성도 함께 커지는 것이다보니 더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블로그 지도에 찍힌 깃발이 늘어날수록 인생의 행복 또한 더 커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