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당시 부산 피난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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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몇 개월 전에 일자리 없이 부산 바닥을 떠돌아다니다 하게 된 경험도 미국유학에 대한 꿈을 꾸게 했다. 정월 명절 때 나는 북한이 고향이던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삼팔 따라지'의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몽땅 마시고 뻗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온통 토한 냄새가 진동했고, 속은 쓰릴 대로 쓰렸다. 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마침 생각난 친구 집을 방문하여 떡국을 얻어 먹고 버스를 탔는데, 배탈이 심해져서 중간에 내리고 말았다. 친구는 자기가 잘 알고 지낸다는 친구 집에 가자고 했다. 가서 보니 그 친구는 경복고 동기동창으로 나와는 그저 일면식이 있던 처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서울대 철학교수 한아무개 박사였다. 마침 그는 방에서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했는데, 그가 타이프를 치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부러웠던 것은, 그가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응시원서를 작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프를 치다 말고 그는 갑자기 툭 던지듯 "너도 미국 유학갈 생각이나 해보지 그래?"라고 말했다. 그 친구 말에"나는 한국의 대학에 갈 처지도 못 되는데 유학은 무슨…"이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친구의 타이프 치던 모습과 "유학이나 가지 그래?"라는 말이 귀속에 맴돌아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왕에 여기까지 와서 빈털털이로 일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아남았으니 미국에 갈 길을 개척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산넘고 물건너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마당에 꾸지 못할 꿈이 있겠나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까지 가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실을 북한의 부모님이 알면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외교행랑을 나르는 일로 미국 영사관에 들락거리다 '유학' 권유를 받게 되었고, 재건단 직원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가 다시 유학 권유를 받게 되었으니, '유학'이 운명처럼 느껴지까지 했다. 유학에 대한 마음을 다지게 되면서부터는 영사관 직원들이 달리 보이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미국 유학과 미국생활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 대학에 응시원서를 보내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게는 여윳돈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장관인 고교 동창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어 내가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반색하며 자기에게도 유학 정보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50개 대학의 정보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각각 25개 대학에 응시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친구는 내가 지원할 25개 대학에 보낼 응시원서의 스탬프 값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응시원서를 보내달라는 서신을 25개 대학에 보냈고, 신기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학교생활, 재정지원 등을 포함한 응시원서 꾸러미를 받게 되었다. 각 대학들이 보낸 서신들은 한결같이 희망 섞인 내용들이었다. 특히 각종 재정지원의 기회가 응시자들에게 열려있다는 내용은 나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다.
그러나 나의 부푼 희망과는 달리 1950년대 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뿌리도 없고 가진 돈도 없는 처지의 나같은 청년에게 쉽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응시를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합법적이고 기본적인 자격들에서 이미 나는 배제되어 있었다. 실력을 인정받고도 한국의 대학입학을 거절당할 때 이상으로 미국 유학은 언감생심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만 직간접으로 받게 되었다. 갑자기 나의 미국유학은 손에 잡힐 듯 금방 눈앞에 나타났다가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신기루에 불과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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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거절당한 탈북 소년, 미국 유학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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