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고등학교 시절 한도원 박사
한도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고 있던 내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그가 제안한 '근사한 일자리'란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학교 간이 매점 관리직 일이었다. 갑작스런 제안이었지만,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즉석에서 고맙다며 받아들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찹쌀떡이나 땅콩을 파는 일, 생강차를 파는 일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교통비를 아낄 수 있는 데다 찜통 더위나 눈비를 피할 필요도 없었고, 여차하면 과자나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울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무섭게만 보이던 훈육주임 선생님이 그렇게 멋있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런데 나의 행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교 매점 관리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후 훈육주임 선생님이 나를 다시 보자고 해서 찾아 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훈육주임 선생님 곁에 웬 군복 입은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제법 관록이 있어 보이는 군인으로, 육군 상사였다. 훈육주임 선생님이 환한 얼굴로 내게 내뱉은 말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한도원, 내가 허락할 테니 오늘 오후 수업 빠져도 돼. 지금 당장 이 군인 아저씨 따라 나서거라."훈육주임 뒤쪽에 약간 비켜 서 있던 구리빛 얼굴의 상사가 내 어깨를 덥석 잡더니 더욱 희한한 말을 쏟아 놓았다.
"한도원 군, 이제 살 판 났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게 될거야, 나랑 함께 가자구! 대령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자초지종을 나누지 않겠나?"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얘긴가 싶었다. 도대체 나를 둘러싼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먼 친척조차 남쪽에서 군인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고, 어머니가 준 아버지 친구 명단에 군인 아저씨는 애초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훈육주임 선생님이 미소로 배웅하는 가운데 상사 아저씨가 타고 온 짚차에 미적거리며 몸을 실었다.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한참을 달린 끝에 서울 외곽의 한 군부대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갈 때 언뜻 보이는 간판을 보니 육군포병학교였다. 헌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정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제법 육중한 모습을 갖춘 갈색 건물이 보였다. 먼 발치에 포병학교를 상징하는 듯한 포신들이 연병장 둘레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는 현관을 지나 조심스레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맨 끝에 웅장해 보이는 사무실이 나타났다. 사무실 앞에는 '육군포병학교 부교장 대령 이기권'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를 안내한 군인이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와!"하는 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정복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일을 보고 있던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하하 한도원군, 정말 잘 왔네. 자네 정말 대단하더군. 이제 우리가 도울 차례야. 걱정말라고!"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다그제서야 나는 감이 잡혔다. 대령은 어느날 내 학교 친구의 부모님 집을 방문했다가 그들로부터 내 얘기를 전해 들었던 터였고, 학교 잡지에 난 스토리까지 모두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 내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돕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한참 나의 사정을 이것저것 캐묻던 그는 거침없이 나에 대한 '예우'를 쏟아 냈다.
그가 내게 전한 예우는 이런 것이었다. 일단 장교들이 묵는 숙소의 방 한 칸을 내주고, 식사도 장교들과 함께 하며, 매일 점심도 장교식당에서 알아서 꾸려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군용차에 태워 등교까지 시켜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령은 내게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지갑에서 한 웅큼의 지폐를 꺼내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뚝 떼어서 건네며 "이건 당장 네가 생활비로 쓸 돈인데, 다 쓰고 모자라면 언제든 말해!"라고 했다.
기가 막혔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껏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긴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교 잡지에 실린 글 하나로 며칠 사이에 '신데렐라'가 되다니! 상황이 너무 갑작스레 반전하니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령의 부관을 따라 내가 묵을 숙소를 돌아보니 푹신한 침대에 스팀 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부관이 내게 보여 준다며 스팀을 틀었는데, 쉬이익 소리를 내며 방안이 금방 훈훈하게 덮혀지던 장면에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겨울 새벽에 하숙집에서 쫓겨나 눈 내리는 을지로 삼정목 거리에서 덜덜 떨던 처지가 아니었던가.
불려가던 그날만 해도 '오늘은 어디서 잠을 청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처지였다. 생전 처음 본 스팀 룸에 깨끗한 미국식 침대에서 꿈같은 첫날밤을 지냈고, 며칠 동안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시 나를 도와준 이름들을 내 기억 저장소에 넣어 두기로 했다. 대령의 이름은 이기권이었고, 그의 명령을 받아 나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도와 주었던 부관 대위는 송찬호였다. 이기권 대령은 한국전쟁 직후 장군으로 승진했으나 5.16 후 박정희의 미움을 사 쫓겨났고, 당시 부관이었던 송찬호 대위도 후에 장군이 되어 승승장구했으나 역시 5.16 쿠테타 직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옷을 벗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기권 장군은 캘리포니아에서 말년을 보내다 2~3년 전에 작고했다.
학교에서는 갑자기 달라진 내 처지에 모두가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나의 행운을 축하해 주었다. 특히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늘 주시하며 돕고자 했던 서갑록 선생님은 병중에도 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고,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님도 자신의 일처럼 반기고 격려해 주셨다. 공부도 제법 궤도가 잡히고 교우관계도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머무르고 싶었던 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평안도 후창강가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세상 모르고 지내던 14세 소년에게 어느날 갑자기 해방이 온 것처럼, 한국전쟁도 그렇게 갑자기 다가왔다. 북에서 혈혈단신 탈출하여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사고무친의 고학 소년에게 전쟁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제껏 겪어왔던 고난은 길고 긴 인생 무대에서 서막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서야 깨달아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 다시 길거리로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던 나는 처음 전쟁의 소식을 듣고는 며칠 지내고 나면 잠잠해질 것으로 여겼다. 그동안 얼풋설풋 들었던 전쟁 소식들이란, 남북 군인들끼리 기껏해야 수십 분 동안 어느 어느 지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더라는 것들이었고, 어느 순간 그 같은 소식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전쟁이 일어났던 6월 25일 아침, 고도를 낮춘 비행기들이 서울 시내를 순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나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룻저녁을 자고나니 점점 가까이에서 포성이 들려오고 이번 전쟁이 삼팔선 부근에서 벌어진 소규모의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서울 시민들은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며칠 후 교장 선생님은 북한이 고향인 학생들을 학교 강당에 모이게 하고는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는 당분간 학교에 머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포성과 총격 소리가 학교 건물을 크게 흔들게 되자 교장 선생님은 슬픈 얼굴로 나타나 휴교령을 발표하면서 "이곳이 더이상 안전하지 않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머리가 멍해져 왔다. 나는 돌아갈 집이 없지 않은가. 포병학교 장교 숙소가 집이었는데, 그 부대가 전쟁이 나서 어디론가 출동해 버렸고 건물도 무너져 내린 형국이니. 신데렐라에서 하루아침에 다시 길거리 나앉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급전직하'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신데렐라'가 된 고학생,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