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VS 판결> 표지사진.
개마고원
2부 '재판대에 오른 판결'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사건들이어서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24년 만에 무죄를 받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KTX 여승무원들의 10년 법정 싸움, 벤츠 여검사 사건, <나꼼수>와 안도현 시인의 국민참여재판 등. 이중 디케의 천칭 저울을 떠올릴 수 있는 두 개의 사건을 소개한다. 일당 5억 '황제노역'과 일당 5만 원 '평민노역'이다.
박경석 1급 척추장애인은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다. 그는 2012년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한 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사이에 화재로 질식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국가의 책임을 주장하면서 노제를 지낸 뒤 차로를 점거하고 행진했다. 법원은 그에게 집시법 위반과 교통방해죄로 200만 원의 벌금형을 확정했다.
그는 벌금형을 거부하고 자진출두해서 구치소에서 노역을 했다. 박 대표의 노역 일당은 5만 원. 그는 닷새만에 건강이 악화돼 교도소에서의 노역을 중단했고, 시민들의 성금으로 남은 벌금을 냈다. 교도소에서 장애인 노역으로 그가 벌충한 금액은 25만 원이었다.
"500억 원대의 법인세 포탈, 100억 원대의 횡령으로 천문학적인 벌금형 판결을 받은 재벌 회장이 벌금을 납부하는 대신 하루 5억 원짜리 노역을 하고 있다면? 2014년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황제노역'이라며 분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책 164쪽)대주그룹 허재호 회장 이야기다. 1심 재판부는 법정형보다 낮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 원을 선고했다. 벌금을 납부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환형유치(벌금형이 확정된 뒤 30일 이내에 납부하지 않는 사람은 교도소 노역장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 때 벌금액을 보충할 노동의 대가) 1일 환산금액은 2억5000만 원이었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벌금을 절반으로 낮추고 일당을 5억 원, 두 배로 올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비난 여론이 일었고, 검찰은 닷새 만에 노역형 집행을 중단했다. 그 사이 허 회장은 30억 원을 탕감받았다. 박경석 대표의 일당과 비교하면 1만분의 1 수준이었다. 이 두 개의 사건을 비교한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는다.
"노역장 유치는 교도소 생활과 별 차이가 없어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은 벌금형을 받고도 징역살이를 하는 셈이라는 비판도 있다. 가진 사람에겐 하룻밤 술값도 안 되는 수백만 원의 벌금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가혹한 형벌이라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일당 5만 원과 일당 5억 원, 당신은 어느 쪽인가."(책 173쪽)[판결 VS 판결 3] 친일파 후손을 당혹케한 판사국가폭력, 내란음모, 종북, 세월호, 표현의 자유 등은 우리 사회 '정의'의 현주소를 진단할 주요 키워드다. 한계는 있지만 법정은 첨예한 쟁점들의 가르마를 타는 곳이기도 하다. 3부 '법정 안의 사회'에서 다룬 사건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세월호와 미네르바 사건, '종북 지자체장 퇴출 주장' 사건과 '이정희 부부 종북 주장' 사건 등 민감한 내용들이다.
3부에는 '부끄러운 판결'이 많이 등장한다. 법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의 궤리가 느껴진다. 특히 판결을 통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사건들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심판을 보아야 할 판사들조차도 법조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이념의 링' 위에 올라가 선수로 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모든 판사가 그런 건 아니었다.
"친일 재산은 '3.1운동의 정신으로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에 위반되는 행위로 취득된 재산이다. 이를 박탈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는 법률이 없으므로 국회가 친일재산 환수법을 만들 때까지 재판을 정지하는 의미로 소를 각하한다."작가는 이종광 수원지법 판사(현 부장판사)의 판결 내용을 소개했다. 을사오적 중의 한명인 이근택의 형 이근호(중추원 부의장, 법무대신)의 손자가 국가 소유로 넘어간 조부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위와 같은 이유로 각하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소송으로 이완용의 후손은 당시 시가 30억 원의 토지를 찾아갔고, 2001년 이후 친일파 후손들이 찾아간 토지를 합치면 여의도 면적 36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 판결은 친일파 후손들에겐 당혹감을 주었고,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판결의 충격 탓인지 한 달 뒤 국회는 드디어 헌법과 법체계의 충돌을 해소한다. 2005년 12월 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것이다."(책 278쪽)작가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판결 VS 판결'은 한진중공업과 쌍용차동차 파업. 법원은 둘 다 불법으로 규정했다. 작가는 두 개의 판결을 분석한 뒤 "임금 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을 하면 귀족노조의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되고 민영화 반대 등 공공성을 목표로 내걸면 그것대로 불법파업이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만 죽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연 법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법으로 정의를 지킬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떠오른 건 <윌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시민불복종>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당연하다."법복을 입은 판사들도 귀담아 들을 말이다. 법치란 인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은 눈을 가린 채 양날의 검과 천칭 저울을 들고 서 있는 디케의 '정의'를 생각게 하는 판결 비평서이자 사회 비평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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