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올랜도 자택 앞에서 만난 한도원 박사
김명곤
두세 시간쯤 걸었을까. 군데 군데 국방색 군대 막사가 둘러쳐져 있고 임시 건물인 듯한 벽돌 건물 몇 채가 세워진 개성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다. 유엔이 운영한다는 피난민 수용소였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군들이 스프레이 통을 들고 나타나더니 양팔을 위로 올리게 하고는 디디티(DDT)를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이와 서캐가 득실득실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디디티 가루를 뿌옇게 뒤집어 쓴 채 캑캑 거리며 간이 식당으로 안내됐다. 오랜만에 맛보는 빵과 수프를 받아 들어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피난민 수용소에는 우리 말고도 이미 많은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다. 며칠을 지내면서 곧 알게 된 사실은, 서울에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기약 없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상당수의 피난민을 지방의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킬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난감했다. 나는 서울에 친척이라곤 없었고 어머니가 만나보라고 한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기껏 죽을 고생을 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기약 없이 이리 저리 옮겨다녀야 하다니.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없었고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처지에 낙심 천만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수용소를 빨리 벗어날 기회가 찾아 왔다. 수용소에서 내 또래의 소년과 사귀게 됐는데, 그는 서울에 친척이 있어서 연락을 해 달라고 수용소에 부탁했으나 소식은 없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다고 했다. 그는 어느날 막사 으슥한 곳으로 나를 불러내더니 귓속말로 자신의 탈출 계획을 넌지시 말해줬다. 귀가 번쩍 뜨였다. 친구에게 나를 끼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 며칠 후 친구와 나는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수용소를 빠져 나와서는 기차역으로 내달렸다. 가는 중에 마주친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나 나이 어린 우리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서울행 기차역에 도착은 했으나 수중에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던 우리는 도둑 기차를 타기로 했다. 개찰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기차가 서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서울행 기차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길게 늘어선 틈을 타서 우리는 허리를 숙인 채 재빨리 철제 울타리를 넘었다. 그리고는 막 열차에 올라 타려는 승객들 틈에 잽싸게 끼어들었다. 서로가 서둘러 열차를 타려는 터에 우리를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친구와 '도둑 기차' 타고 서울로우리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차례 '쥐와 고양이' 게임을 해야만 했다. 저만치에서 제복을 입은 검표원이 다가오려하면 뒤쪽으로 슬금슬금 도망치다가 화장실에 숨거나, 열차가 정거장에 서면 얼른 내려서는 출구 쪽으로 걷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뒤돌아서서 다음 열차칸으로 옮겨타곤 했다. 가슴을 졸이기는 했지만 어린 마음에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했던 것이 기억난다.
서너 시간쯤 달렸을까. 드디어 서울역에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열차가 역사 가까이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자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서울여억! 서울여억!" 얼마나 듣고 싶었던 소리인가. 평안도 후창 내 고향에서부터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온 것이다. 산야를 헤매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2년여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몽땅 털린 일과, 덜덜 떨며 쪼각배와 동력선에 올라 반 죽은 송장처럼 실려서 서해 바다를 건너고, 디디티를 뒤집어 쓰고 낙심의 나날을 보냈던 수용소 생활 등이 언제 일이냐 싶게 환희에 젖어 들었다.
역사에서 걸어나오면서 본 서울은 듣던 대로 오가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고 크고 작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촌 동네 소년에 불과한 우리가 보기에 휘황찬란했다. 여기 저기 음식을 파는 장사꾼들이 즐비하게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엄청나게 시장기가 느껴져 왔으나 눈요기만을 해야 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역사 화장실 세면대로 달려가 수돗물을 들이키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서울역 대기실 구석에서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친구는 삼촌 집을 찾아 나설 생각이라며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나는 친구의 제안이 고맙기만 했다. 다행히 친구의 삼촌 집을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친구의 삼촌은 우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깜짝 반가워했다.
그는 푸지게 점심밥을 차려 먹이고 자초지종을 듣더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산을 넘고 대해를 건너 북한을 탈출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경이로웠을 것이다. 점심을 먹는 중에 친구의 삼촌은 광화문 한복판에 '서북청년단'이라는 단체가 있다면서 그곳에 찾아가면 숙식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점심을 먹는 즉시 나는 그 단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 곳곳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젊은 남녀 학생들이 전차에서 오르고 내리는 모습들,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길을 가는 노인들, 중절모를 쓰고 지나가는 중년 남성들, 양장을 맵시있게 차려입고 지나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엿이나 떡,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이 손님을 붙잡는 모습도 보였다. 종종 미군 트럭이 경적 소리를 내며 지나치기도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것 저것 구경하다 어렵지 않게 '서북청년단'이라는 간판을 내 건 건물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숙식 제공해 준다" 반공 단체에 가입노크를 하자 한 청년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북한에서 탈출한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손짓을 하며 나를 건물 안으로 들게 했다. 가구가 갖춰진 큰 방 안에는 많은 청소년이 여기 저기 누워 있거나 삼삼오오 떼를 지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우르르 곁으로 몰려 들었다. 내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내가 누구인지, 왜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를 대략 설명하자 모두가 놀라는 표정이었고 잘 왔다며 격려해줬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청년들은 내가 서북청년단에 가입 서약을 하면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서북청년단은 북한 탈출자 중심의 극렬 반공 단체였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일단 그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기로 했다. 당장의 배고픔과 잠잘 곳을 해결해 준다니 고마울 뿐이었다.
별로 하는 일은 없이 불안하고 어수선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나에게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여러 명의 청년들과 군용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를 질주하며 반공 구호를 외치거나 반공궐기대회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특정 사상에 빠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했지만, 부잣집 장남으로 곱게만 자라온 터에 사상 논쟁에 몸을 던져 외치고 다닐 만한 체질은 못 됐다.
더구나 북에 있을 때 그렇게 순진하기만 하던 어렸을 적 친구들이 '김일성 장군 만세!', '자본주의 타도하라!'며 외치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무겁고도 거칠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왠지 싫었던 기억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쪽으로 온 내가 그 같은 사상 싸움의 또 다른 끝에 마주 서서 목소리를 높여야 하다니. 후창강 마루턱에서 글썽이는 눈으로 마지못해 나를 떠난 보낸 어머니가 바라던 일이 결코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갈 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곳을 미련없이 빠져 나왔다. 이제 찾아 나설 곳은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정말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라"며 일러준 아버지의 친구들 집이었다. 어머니가 당부하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끔찍하리만치 싫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상 싸움을 하러 남쪽에 내려온 것도, 내 한 목숨을 건져 보려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내려온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다. 평생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라곤 하지 않고 살아온, 집에서나 밖에서나 대접만 받고 살아온 처지였던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러 나서게 되었다.
찾아간 아버지 친구집 "북으로 다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