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창에서 해주로. 1947년 8월 14일 고향(후창)을 떠나 강계까지 트럭으로 이동한 후, 기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 다음날 해주로 떠났다. 그리고는 해주에서 고깃배로 야반 탈출을 시도했다.
김명곤
이렇게 해서 나를 남겨 둔 채 백군은 야음을 틈타 몇몇 어른들과 그 집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얼풋 잠을 청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잠을 깬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행운을 빌었다. 모두가 도둑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사립문 밖으로 어둠을 타고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 보고는 방에 들어와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얼풋설풋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틈으로 밖의 동태를 살폈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쯤 지나자 내 친구를 비롯한 탈출자들을 동반하고 나갔던 주인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황급히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숨을 고르며 그가 내뱉은 말인즉슨, 그들이 해안가 비밀 접선 장소에 도착하여 막 고깃배를 타려던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경비원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미친 듯이 달아났고 자신도 냅다 도망쳐 집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당신 친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며 내게 손짓으로 방에서 빨리 빠져나오라고 했다. 그는 "만약 친구가 붙잡혔으면 당신 소재가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며 빨리 소지품들을 챙겨 인근의 숲속으로 피신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상기된 얼굴로 주인이 전한 말들은 내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가슴이 쿵쾅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와중에 정신없이 주변의 소지품을 챙겨 넣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리고는 집앞에 낮게 계단식으로 층층이 펼쳐져 있던 밭두렁을 타고 냅다 달려나가 시커먼 숲속의 어두움에 몸을 숨겼다.
가슴이 콩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숲속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쫑긋 세웠다. 한여름 모기가 극성을 부리며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멀리 산허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도대체 나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불안하기만 했다.
나는 그 밤을 숲 속에서 꼬박 세우고는 허리를 반쯤 구부려서 살금살금 주인 집 울타리까지 접근했다. 기웃기웃 동태를 살피는 동안 주인 남자가 마당 밖으로 나와 헛기침을 해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일이 없는 듯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얼른 나를 발견한 주인 남자가 안으로 들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사립문 사이로 슬며시 들어가자 그의 부인이 반색을 하며 맞았다.
"청년은 참 운이 좋구만요. 아침에 경비원들이 다녀갔는데, 아마 오늘 중으로 다시 오지는 않을 거구만. 조용해질 때까지 며칠만 기다리면 다시 배를 탈 기회가 있을 거니깐 참고 기다리면 될 거라요"라고 했다.
"청년은 참 운이 좋구만", 그런데... 불안불안한 가운데 오두막 집에서 사흘째 머물던 밤, 주인 남자가 다시 데려온 몇 명의 탈출자들과 나를 부르더니 오늘 밤에 배를 타러 가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 했다. 다행히도 주인 여자가 배낭을 해주역에서 찾아온 날이었다. 이제 드디어 내 차례가 온 것이다. 그날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지정된 시각, 주인이 흔들어 깨우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는주인을 따라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우리는 살금 살금 동네 고샅을 걸어 나갔다. 풀벌레 소리와 개 짓는 소리만 정적을 깰 뿐 사위는 고요했다. 마을길을 빠져나가 여러 개의 높고 낮은 언덕과 논밭을 이리저리 가로질렀고 빽빽한 나무숲을 헤치며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어두움과 긴 도보 행군이 두려움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여유가 생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쯤 걸었을까. 가까운 곳 어디에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희끗한 빛이 눈앞을 스치는가 했는데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눈 앞에 나타나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래 걷다 보니 갑자기 보여진 환영인가? 아니었다. 웬 말 한 마리가 우리의 앞길을 떡 막아 서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위에서 무장을 한 북한 경비병이 고삐를쥔 채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말에서 조용히 내린 그가 낮게 소리쳤다.
"간나 새끼들, 꼼짝 마라우야! 가지고 있는 짐 모두 내려 놓고 머리 위로 두 손 번쩍 들라우!"북한 경비병이 말에서 내려 플래시를 비추자 서너 명의 다른 경비병들이 총구를 앞으로 하고 주변에서 뛰쳐 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포위하고는 여차하면 발사하겠다는 태세였다. 모두가 사색이 되어 얼어 붙은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제자리에 정지했다. 여기 저기서 내던져진 짐이 풀썩 풀썩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늘이 노랗고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빈 듯했다. 아, 친구가 며칠 전에 당하고 나도 여기서 끝나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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