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원 박사
김명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광복절 2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947년 8월 14일 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미리 꾸려 둔 간단한 괴나리봇짐을 등에 걸머졌다. 봇짐 속에는 며칠 먹을 쌀과 갈아입을 옷가지가 전부였다.
어머니는 가슴을 후벼내는 듯한 아픔을 참으면서 "담배 피지 마라" "술도 마셔선 안 된다"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소년의 마지막 말은 "내년 여름방학이면 돌아올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였다. 그의 나의 16세때였고, 그는 부유한 집안 3남 3녀의 맏아들에다 장손이었다.
그렇게 평안북도 후창을 떠난 소년은 이후로 영영 부모 형제들을 만나지 못했다. 1990년 10월 어느날 북한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평생 "틀림없이 우리 아들은 살아 있어!"라고 되뇌었다던 어머니는 6개월 전에 세상을 뜨고 없었다.
간신히 도착한 서울, 주머니는 빈털털이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며 서울에 도착한 소년은 아버지의 친구 집과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 집을 전전했고, 그야말로 '굶기를 밥먹듯'하며 그날 그날을 견디고 있었다. 두 학기 등록금을 포함한 비상금은 남하하다 안내원과 북한 경비원의 계략에 속아서 털린 상태였다.
하지만 머리가 좋았던 소년은 겨우 보름을 공부하여 현지 학생들도 어렵다는 일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처음 마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싸움을 말리다 사귀게 된 미군의 호의로 미군부대에서 한국인 노무자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대 외곽을 전전하는 피난민들과 잡상인들의 접근을 막는 경비 감독관으로 임명되었고, 미군은 그에게 중위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영어가 통한 덕분이었다.
얼마 후, 부산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일을 그만 둔 그는 마치지 못한 고등학교 수업을 듣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은사의 친척 소개로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서 일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일하던 한 미군 엔지니어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되었다. 수십 개의 미국 대학교에 편지와 입학 지원서를 보냈고, 결국 그는 한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서와 함께 장학금을 주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미주리 주의 사우스 웨스트 미주리 주립대학(현 미주리 주립대학)으로부터였다.
이후로 유학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천신만고 끝에 2년 만에 비자를 손에 쥐고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