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노숙자 방치, 법원 판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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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어느 날 새벽 서울역 대합실. 체감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 노숙인 최고단(가명)씨가 쓰러져 있었다. 순찰을 돌던 서울역 직원 엄규정(가명)씨는 그에게 다가갔다. 최씨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고 몸에선 술냄새가 진동했다.
엄씨는 일단 119를 불렀다. 출동한 구급대원은 최씨가 맥박이 정상인 걸 확인한 뒤 단순 주취자라고 보고 돌아갔다. 그런데 최씨는 술에 취한 것만이 아니었다. 갈비뼈가 심하게 부러져 있었고, 장기에도 손상이 가 있는 심각한 상태였는데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최씨를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엄씨는 역사 관리를 위해서 원칙대로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곤 철도안전법을 떠올렸다. '철도종사자는 역시설 또는 철도차량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한 사람을 밖으로 퇴거시킬 수 있다.'
그는 동행한 사회복무요원에게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최씨는 대합실 출구 앞 찬바닥에 내려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곳에 또 다른 사회복무요원 변인성(가명)씨가 나타났다. '노숙인이 쓰러져 있으니 확인하라'는 무전을 받은 뒤였다. 그 사이 한겨울 추위에 방치된 최씨의 몸상태는 더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변씨도 역무원의 지시에 따라 노숙인을 역사 밖으로 멀리 이동시켜야 했다. 그는 후배를 불러 둘이서 최씨를 휠체어에 태우고 한참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서울역사 구름다리 아래에 최씨를 내려놓았다.
최씨는 그날 낮 12시경 숨진 채 발견됐다. 그런데 사인은 동사가 아니었다. 흉부의 고도손상(갈비뼈 골절과 폐의 파열)이었다.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 결국 최씨는 한겨울 길거리 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노숙인을 역사 밖으로 방치해 사망, 무죄인 까닭?'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언이 있다. 법은 도덕의 범주 안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 개입하는 게 타당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디까지 도덕의 영역이고, 어디부터 법의 영역인지 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노숙인 최씨를 역사 밖으로 끌어낸 서울역 직원 엄씨와 사회복무요원 변씨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만일 최씨를 병원으로 후송했더라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법은 그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먼저 법조항부터 따져보자. 두 사람을 피고인석에 세운 죄명은 형법의 유기치사죄다. 사람을 유기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다. 형법의 유기죄는 다음과 같다.
노유(老幼), 질병 기타 사정으로 인해 부조(扶助)를 요하는 자를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주의 깊게 볼 대목은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이다. 예를 들어 노부모를 모시는 자식, 아이를 키우는 부모,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사고 운전자를 발견한 경찰 등은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처벌대상이 된다. 하지만 단순히 도덕적 의무로 보호했어야 할 사람에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서울역 직원은 취객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걸까.
법원(서울중앙지법 권태형 판사)은 의무가 없다고 해석했다. 한국에는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구조하지 않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처벌하는 법,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 법'(구조거부죄, 불구조죄)이 없다.
법원은 "우리 형법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기본형식으로 취하지 아니하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만을 (유기죄의) 범죄주체로 설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관련법을 살펴봐도 서울역 직원이나 사회복무요원의 구조의무나 부조의무를 부과하는 규정이 없다고 보았다.
법원 "서울역 직원은 노숙인이나 취객 보호할 법률상 의무 없다"검찰은 공사 직원이나 사회복무요원은 공무원처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니 '사회통념상' 당연히 어려운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법원은 "유기죄의 부조의무를 확장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며 무죄로 판결했다. 법에 나와 있지 않는 한 판사의 마음속 잣대로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2심과 3심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역 직원은 노숙인이나 취객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 법률상·계약상 보호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법의 논리, 과연 타당할까.
더 냉정하게 말하면, 거리에서 생사를 오가는 응급환자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더라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도록 촉구하는 일은 도덕의 영역에 두어야 하나, 아니면 법으로 처벌해야 하나.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판결을 마치며'라는 제목으로 소회를 털어놓았다. "피고인들에게 유기죄의 형사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망인의 죽음 앞에 도덕적인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노숙인의 죽음 앞에 법은 무력하기만 했다.
[판결 2] 공공임대주택 노인 퇴거사건"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민사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원고가 법원에 내는 서류 : 기자 주)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수필이나 소설로 보일 테지만, 판결문의 일부다. 대체 어떤 노인의 기구한 사연을 보았길래 판사는 장탄식을 늘어놓게 하는 판결을 썼을까. 속사정을 캐보자.
충남 연기군에 사는 70대 이장혁(가명)씨는 뇌경색에 걸린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전혀 거동을 못하는 아내의 대소변을 가리는 일부터 밥을 먹이는 일까지 모두 이씨가 도맡아야 했다.
갈수록 형편이 어려워진 이씨는 마침 공공임대아파트가 지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근처에 살던 작은 딸 상미(가명)씨를 불렀다. "얘야, 임대주택이 나왔다던데 우리 내외 살 집 있는지 한 번 알아봐주련?"
공공임대 아파트 거주 70대 노인이 쫓겨난 사연평소에도 아버지의 심부름을 도맡았던 상미씨는 주택공사를 찾아갔다. 변변한 정보도, 법률지식도 없이 무작정 방문한 상미씨는 아버지 명의로 계약을 하려면 준비해야 할 서류가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신분증, 도장, 위임장도 없어서 막막했다.
'그냥 내 이름으로 하면 안 될까.' 상미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임대아파트는 원래 무주택자만 입주할 수 있었다. 당시 남편 명의로 집이 있던 상미씨는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담 직원은 뜻밖에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이유인즉 이 아파트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적어 미달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택공사는 요건이 안 되는 주택 보유자에게도 선착순으로 입주를 허가했다. 상미씨는 얼떨결에 자기 이름으로 계약을 마쳤다. 그 뒤에 다가올 여파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 채.
어쨌거나 딸 상미씨 덕분에 이씨는 아내와 함께 24평 임대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다. 입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의 아내는 병마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홀로 되었다.
5년이 지났을 무렵 임대아파트를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공고가 났다. 자격조건은 '입주일 이후부터 분양전환 당시까지 임대주택에 거주한 무주택자인 임차인'이었다. 이씨는 자신도 분양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주택공사는 되레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분양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내 병수발 때문에 임대아파트 계약을 딸에게 맡겼을 뿐이고, 계속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사실 상미씨가 아버지를 위해 대신 계약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계약서 어디에도 '이장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실수라면 아내의 간병을 위해서 직접 주택공사를 가지 못한 게 실수고, 죄라면 법에 무지한 게 죄인 셈이다. 실수와 무지로 이씨는 꼼짝없이 쫓겨나게 되었다.
"아내의 간병 때문에 딸이 대신 계약..." 1심 인정 안해